Kyoto Review of Southeast Asia Issue 11 (March 2011): Southeast Asian Studies in Korea
1. 한류의 전개
1990년대 말 이래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 대중가요 그리고 연예인들이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상당한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세계적인 언론매체와 연예업계 전문지 등은 이를 “한류”(Korean wave)라 표현하면서 아시아에서 한국 대중문화가 가진 영향력을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2002년 3월 미국 AP통신의 보도는 다음과 같다:
그것을 ‘kim chic’이라 부르자 1 한국의 모든 것들이 – 음식과 음악뿐 아니라 미용과 구두까지 – 전통적으로 일본과 할리우드가 장악하였던 아시아 대중문화 시장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Visser 2002).
또한, 미국의 영화산업 업계지인 <할리우드 리포터>(Hollywood Reporter)는 “세계영화계의 산간벽지나 다름없던 한국이 아시아에서 가장 핫(hot)한 시장으로 변모하였다”(Segers 2000)고 보도했다.
하지만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한국의 대중문화가 외국에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던 적은 거의 없었으며 해외 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었던 경우도 드물었다. 예를 들어서, 전세계 대학에서 영화사(映畵史) 교재로 흔히 채택되고 있는 책 중의 하나인 <옥스퍼드 세계영화사>(원제: The Oxford History of World Cinema)의 1996년도 판은 일본, 대만, 홍콩 및 중국 영화에 대하여 거의 찬사 수준의 소개를 하였으나 한국 영화에 대해서는 적절한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Nowell-Smith 1996). 한국의 대중음악도 연구자들에게 무시 받았던 것은 마찬가지여서 1994년에 영국 런던에서 발간된 <개략적인 세계 음악 가이드>(원제: World Music: The Rough Guide)는 한국음악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이 나라의 경제는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다. 하지만 대중음악에 관해서라면 주목할만한 경지에 이른 인도네시아, 오키나와, 일본의 사운드에 전혀 견줄만하지 않다” (Kawakami and Fisher 1994).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인식이 이 정도였으니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한국인들조차 한류에 관한 보도를 믿기 어려워했다. 예를 들어 당시에 발간된 한 시사잡지 칼럼을 보자.
한국 배우 배용준이 일본에서 “욘사마”로 불릴 정도로 인기 있다는 보도를 들을 때마다 나 같은 평범한 한국인이 느끼게 되는 것은 뭐랄까 ‘당혹스런 즐거움’ 같은 것이다…. 오랫동안 문화 수입국이었던 한국이 이제 문화 수출국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자랑스러운 감정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도대체 우리 문화의 어떤 면이 외국인을 사로잡는지 궁금하기조차 하다 (Lee 2004). 2
위 인용문은 한류 보도에 대한 한국인들의 초기 반응이 어땠는지를 잘 드러낸다. 즉, 자국의 문화적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오랫동안 “외침”에 맞서 저항해온 한국에 “약자 콤플렉스”가 또한 형성되어 왔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한국 대중문화가 해외에서 인기 있다는 사실을 한국인들조차 쉽게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통설에 의하면 한류는 1997년 중국 국영 CCTV가 방영한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가 중국 방송사상 두 번째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할 정도의 큰 인기를 끈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허진 2002).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이후 여러 한국 드라마가 지속적으로 중국에서 방영되었으며, 대만,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지에 진입하게 된다. 게다가, 1990년대 후반 아시아 전역을 휩쓴 경제위기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수입업자들로 하여금 가격경쟁력이 있는 한국 TV 드라마를 선호하는 조건을 조성하였다. 실례로, 2000년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는 일본 드라마 가격의 1/4, 홍콩 드라마 가격의 1/10 정도에 거래되었다 (Lee 2003). 한류 열풍은 텔레비전 프로그램 수출 증가로 이어져, 1999년에 미화 1,270 달러 정도였던 수출 총액은 2007년 미화 1억 5,095 달러로 급등한다 (Ministry of Culture and Tourism 2008).
한류는 TV 드라마뿐 아니라 영화와 가요에서도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보이 밴드 H.O.T는 1998년경 중국과 대만의 인기 가요 순위에서 1위를 차지했다. H.O.T는 2001년 해체 이후에도 앨범 판매고가 꾸준히 상승할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2002년에는 십대 소녀 보아의 가수 데뷔 앨범이 일본의 “빌보드차트” 격인 오리콘차트를 석권했다 (Visser 2002). 이후 아시아에서 한국가요의 인기는 꾸준히 상승해, 최근 캄보디아와 태국에서는 걸 밴드 원더걸스와 소녀시대의 노래와 안무를 표절하는 가수들이 등장하고 있다. 한국 영화도 이제 일본, 홍콩, 싱가포르 등 아시아 전역의 극장에서 종종 상영되고 있으며 베니스, 칸느 등 국제영화제 수상작 리스트를 늘리고 있다.
이 같은 대중문화 한류는 점차 음식, 패션뿐 아니라 성형수술 등 소비문화로 확대되었다. 이제 아시아의 젊은이들이 가방, 노트북 커버 혹은 침실 벽을 한국 스타 사진으로 도배하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다. 중국과 대만에서는 젊은 여성들이 성형외과에 가 한국 영화배우 이영애, 송혜교, 김희선, 전지현 등의 얼굴처럼 고쳐달라고 요구하는 일이 많다고 언론에 보도된 바 있다 (Joins.com 2001; Straits Times 2002a and 2002b). 한국 영화배우들의 성형수술 전후 비교 사진이 인터넷을 통해 자주 알려지게 된 후에는 중국, 베트남, 싱가포르 등지의 여성들이 한국에 원정 와 성형수술을 받는 경우도 늘고 있다. 이제 “성형수술 한류”라는 말까지 회자되고 있다 (Kim Chul-joong 2009).
또한 한국 대중문화의 인기는 한국어 학습과 한국관광으로 이어졌다. 예를 들어,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시험인 토픽(TOPIK, Test of Proficiency in Korean)의 전세계 수험생 숫자는 1997년 2,692명에서2009년 189,320명으로 증가했는데, 이러한 변화의 주요 요인이 한국 드라마 인기에 따른 것이라 한다 (Yi 2009). 동남아시아의 여행사들은 한국 드라마 촬영 장소를 방문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 관광 패키지 상품을 출시하고 있다. 한국관광공사 (KNTO, Korea National Tourism Organization)도 마찬가지로 한류에 편승한 다양한 관광 상품을 개발하고 있다.
한국 대중문화의 해외 인기는 외화획득의 기회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과 주변국과의 외교적 갈등을 해소하는 데에도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 베트남 사람들에게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과의 교전 사실은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대만 사람들은 한국이 중국과의 수교를 위해 1992년 어느 날 갑자기 외교관계 단절을 통보했다는 데에 분개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한류스타들은 한국의 대외 이미지 개선에 큰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2001년 8월 정상회담 차 방한한 베트남의 쩐 득 르엉 국가주석은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게 “베트남 국민배우”로 불릴 만큼 인기 있던 배우 장동건과 김남주를 만찬에 초대하도록 부탁한 바 있다 (Australian 2002).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 (Le Monde)가 한일 관계의 개선에 관한 특집기사를 실었을 때 표지를 장식한 보아는 도쿄에서 개최되었던 양국 정상회담에 초대된 바 있다. 이렇듯 한류는 한국 언론에 의해 1910년 한일병합보다 더 심각한 국치(國恥)로 규정되었던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이른바 IMF시대 한국인들에게 큰 위안거리였다.
다음 장에서는 한국에서 한류에 대한 연구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한류가 학문적 논의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살펴보겠다.
2. 한류의 연구
주지하다시피, 한류는 아시아에서 발흥한 이래 중동,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으로 그 세력권을 넓혀가고 있다. 하지만 그 동안 한국에서 이루어진 한류 연구는 주로 중국과 일본에서의 한류 현상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이유가 있는데, 우선 한류가 중국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게다가, 중국이 한류의 최대 시장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라는 점은 한국의 연구자들로 하여금 중국 시장의 동향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갖도록 이끌었다. 비슷한 경제주의적 관점으로부터 현재 한류 최대 시장인 일본에서의 한류는 언론의 주목 대상이 되었다. 게다가 오랫동안 한국의 아시아적 관심의 지평이 동북아시아에 국한되었던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동북아시아 편향성을 고려할 때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 일본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전역의 한류 전개 상황을 정리·분석한 신윤환 외 저 <동아시아의 한류>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이외에 심두보(2007)는 싱가포르에서의 한류라는 새로운 문화적 상황이 싱가포르 거주 한국인 여성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분석한 논문을 제출하였다. 그에 따르면 한류는 가정 내 성정치학적(性政治學的) 측면뿐 아니라 가정 바깥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외국인 접촉 상황에서 한인 여성들에게 사회·문화적 권능을 부여하는(“empowered”) 역할을 했다고 한다. 또한 한국의 신현준과 태국의 우본랏 시리유바삭은 공동연구를 통해 태국 젊은이들 사이의 K-pop 소비 현황 및 한류 전개에 따른 문화적 맥도널드화(McDonaldization)에 대한 태국인들의 우려를 분석했다 (Siriyuvasak and Shin 2007).
한류라는 실체를 통해 초국적(超國的) 문화 흐름의 다양성을 직접적으로 경험한 한국인 연구자들은 국제 커뮤니케이션 이론 및 세계화 (globalization)에 관한 담론을 보다 깊이 있게 성찰하기 시작했다 (Kim Sujeong 2009; Jeon and Yoon 2005). 일례로 심두보(Shim 2006)는 세계화가 일방향적 국제 흐름과 동의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세계화 담론 (globalization discourses)이 적어도 세 가지의 각기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고 또 경쟁하고 있음을 밝혔으며, 이를 통해 국제 커뮤니케이션의 주요 쟁점을 다루고 있다. 세 가지 담론 중 첫 번째는 세계화가 1970년대 “신세계 정보언론 질서” (New World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Order) 논의의 주요 쟁점이었던 문화 제국주의의 연장선 위에 있다고 바라보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세계화는 미국 혹은 서구의 정부 및 대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며, 개발 도상국 혹은 세계체제 주변부의 문화를 예속(隸屬)시키고자 하고, 국가적 독자성을 약화시킨다고 한다. 이 시각은 외국 TV 프로그램과 외래 문화의 유입에 따른 “부정적” 결과를 우려하는 개발도상국 및 제3세계 독재국가들의 정치적 담론으로 활발히 이용되어 왔다. 하지만 그 논리의 단순성으로 인해 학문적으로는 비판의 대상이 된 지 오래이다 (Chadha and Kavoori 2000; Morley and Robins 1995). 사실, 오늘날 TV 프로그램과 영화 등 매체상품의 국제적 흐름의 실상을 살펴보면 문화제국주의 이론이 활발히 논의되었던 1970년대적 상황과는 달리 주변부로부터 중심부로 향해가는 문화적 유통의 양이 증가하여, 국제 문화 유통을 더 이상 서구로부터의 일방통행이라고 단정짓기 어렵게 되었다. 특히, 미국의 매체학자 조셉 스트라우바가 “문화적 친밀성” (cultural proximity)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바 있듯이, 각 대륙 내 혹은 각각의 (언어) 문화권 내에서 국가간 문화교류는 증가일로에 있다 (Straubhaar 1991). 또한, 미디어 콘텐츠에 대한 시청자 수용의 복잡다기한 측면을 놓치고 있을뿐더러 (Wasko et al. 2001), 이 시각에 내포되어 있는 문화 독자성을 강조하는 경향은 맹목적인 국수주의로 대중을 유도할 위험성이 있다는 점이 지적된다 (Morris 2002).
세계화의 두 번째 담론은 세계화를 근대성 기획 (modernity project)의 자연스런 결과물로 보는 것이다 (Giddens 1991). 존 톰린슨 (1991)에 의하면, 세계화는 “근대성의 전파”이자, “역사적 발전”이며 “자본주의를 향한 전세계적인 행진” (p. 90)이라고 한다. 이러한 시각은 막스 베버 (2000)의 “자본주의란 계몽주의의 이상인 이성과 자유로 나아가는 진보의 연장선”이라는 주장에서 이미 확인된다. 이와 관련한 더 근래의 사회과학적인 연구로 데이비드 하비 (1990)와 프레드릭 제임슨 (1996)은 정보 테크놀로지의 획기적인 발전에 따라 1970년대 이래로 인류가 새로운 시대 (근대에서 후기 근대사회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후기 자본주의 사회로)에 진입하였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에 대하여 일군의 정치경제학자들은 근대성과 자본주의를 혼합하여 바라보는 시각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엘렌 마익신스 우드 (1998)에 따르면, 근대성 기획의 시작점으로 여겨지는 18세기 프랑스에서 당시 부르주아 계급은 인간해방 및 진보, 그리고 보편주의의 실현을 위해 귀족계급과 투쟁했으며, 반면에 자본주의란 그 본질적 목표가 재산의 증식에 있는 것이지 인류의 진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인간의 탐욕에 기초한 자본주의야말로 20세기 이래 발생한 과학기술 중심주의, 그에 따른 생태학적 붕괴와 전쟁 등의 전지구적 재앙을 초래한 주범이라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만약 자본주의가 근대성과 어떠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근대성을 파괴하는 데 기여했다는 사실뿐이라고 한다. 마익신스 우드는 덧붙이기를, 기본적으로 지리학적 용어인 “전지구화” 혹은 “세계화”는 현재의 역사적 환경을 기술하고 설명하는 데에 적절하지 않다고 한다. 대신에, 자본주의가 인간 삶의 모든 조건에 침투하고 사회 문화의 모든 국면을 장악했다는 의미에서 “자본주의의 보편화”라는 용어가 이 시대를 더 잘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로버트 맥체스니 (1998)는 세계화를 근대성의 산물로 보는 시각에 대해 우려를 표시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인식은 신자유주의에 대하여 – 특히, 최근 미디어산업을 특징짓는 대자본의 지배와 과다상업주의 (hyper-commercialization)에 대하여 – 역사적 “필연성”을 부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계화의 세 번째 담론은 후기식민주의적 관점을 통해 세계체제의 중심부와 주변부간의 권력관계를 연구하는 것과 관련된다 (Kraidy 2002). 지난 세기말 이래의 세계화는 역설적이게도 개발도상국 및 탈식민국가 국민들로 하여금 수십 년간의 서구화/근대화 과정 속에서 잊혀지거나 고의로 무시해버린 과거와 재 대면하도록 혹은 과거를 되찾도록 이끌고 있다 (Featherstone, 1993; Robertson, 1995). 이러한 재지역화(re-localization)에는 두 가지의 뚜렷이 구분되는 양상이 있다. 그 하나는 인도의 힌두 민족주의자들이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세력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형태인데 이들은 외부와의 교류를 경계하며 다소간 역사적 상상력에 기초한 그들 고유의 “요순시절(堯舜時節)”로 돌아가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고 있다. 다른 하나는 소위 “아시아의 4룡”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를 지칭) 등 개발 경제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형태인데, 이들 국가는 새롭게 펼쳐지고 있는 글로컬(glocal)한 경제상황에 맞추어 자국의 경제발전 모델을 재평가, 보완, 강화하는 데 주력하고 이의 일환으로 고유의 문화적 유산(cultural heritage)을 상품화하고 있다. 재지역화의 형태는 이렇게 차별적이고 상반되지만, 과거 식민지배에 의한 중심부와 주변부간의 문화적 회합(會合)이라는 후기식민주의적 역사적 조건은 동일하다. 이런 점에서 혼종성은 탈식민의 경험을 가진 모든 지역의 문화적 표현으로서 필연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예를 들어, 탈식민국가 대중은 과거 식민지배 국가로부터 발원된 음악, 음식, 영화, 패션 등의 문화양식, 스타일, 관례(慣例) 등을 전유(轉有)하여, 자신들의 일상적 의미를 새겨 넣고 있다 (Bhabha 1994).
한국 미디어 산업 발달의 내재적 요인을 찾는 데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은 혼종성 이론에 의존하여 논의를 펼쳤다. 예를 들어 심두보(Shim 2006)는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한국 미디어산업계에 팽배하였던 위기의식에 우선 주목하였다. 당시, 미국의 시장개방 압력에 굴복하여 한국 정부는 할리우드로 하여금 한국 내 시장에 영화를 직접 배급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 직후 몇 년간 한국 내 수많은 영화배급업자들의 도산이 잇달았고, 영화 제작 편수는 급격히 감소하였으며, 방화(邦畵)의 국내시장 점유율은 가파르게 하락했다 (Shin 1995; Yi 1994). 결국, 이미 국내 영화 팬들에게 외면 받고 있었던 한국영화는 마지막 숨을 힘겹게 내쉬고 있는 듯 보였다.
이제, 한 민족사회의 문화적 표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야 할 영화의 위기에 직면하여 한국의 정부, 시민사회, 영화산업 및 팬들은 한국영화 회생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 재건(再建)의 과정에서 국내의 문화적 행위자들은 제국의 형식과 타협했고 글로벌한 기준에 영향을 받았으며 이를 통해 자국의 문화적 공간을 구축하고 확장해 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문화적 혼종화를 더욱 촉진하였다. 이러한 연구는 “세계화”가 지역적 정체성을 유지, 강화하는 혼종적 형식을 배양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동남 아시아에의 활기찬 유입으로 증명되는 한국 미디어 산업의 역동성은 오랜 역사를 지닌 서구, 특히 미국 중심의 세계 문화산업 지배라는 구조적 맥락에서 볼 때 제국의 지배를 오염시키는 것이자 하위주체(subaltern)의 탄력성을 드러내는 훌륭한 사례이다. 하지만, 바로 이 한류 현상은 우리에게 두 가지 다른, 그러나 서로 연결고리가 있는, 고민을 던지고 있다. 첫째로, 미국 문화제국주의 비판을 단초로 해서 발달하기 시작한 한국 문화산업이 몇몇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게는 새로운 문화제국주의로 여겨지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로는, 한국 대중문화에 열광하는 아시아 여러 나라 시민들의 감정 에너지를 동아시아 공동체 형성에 필요한 동력으로 전이시킬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홍콩의 한 영화 비평가에 따르면 한류는 가족의 가치와 같은 아시아적 감수성을 잘 다루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Chon, 2001). 일본의 미디어 연구자 코이치 이와부치 (Iwabuchi, 2001, 56)에 따르면, 아시아 지역내에 유통되는 대중문화 상품은 미국 대중문화가 잘 대변할 수 없는 “특정한 (후기) 근대성의 공통의 경험과, 함께하는 시간 속에 살고 있다는 의식”을 제공한다고 한다. 같은 프로그램을 즐기는 시청자간에 비슷한 정체성이 형성될 수 있다고 하는데, 과연 한류는 아시아에서의 “상상적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인가?
심두보
성신여자대학교
이 글은 저자의 기출간 논문 3편을 요약, 수정한 것임을 밝힘. 해당 논문들은 다음과 같음: 1) 심두보 (2004), “국제 커뮤니케이션 현상으로서의 한류와 하이브리디티,” <프로그램/텍스트>, 제 11호, pp. 65-85; 2) Shim, D. (2006). Hybridity and the rise of Korean popular culture in Asia. Media, Culture and Society 28(1), 25-44; 3) Shim, D. (2008). The growth of Korean cultural industries and the Korean wave. In Chua Beng Huat & Koichi Iwabuchi (Eds.), East Asian Pop Culture (pp. 15-31). Hong Kong: Hong Kong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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