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진출 한국기업의 노사관계: 1990년대 초반 진출 초창기를 중심으로

Shin Yoon Hwan

Kyoto Review of Southeast Asia. Issue 11 (March 2011). Southeast Asian Studies in Korea

1. 해외진출기업과 현지노동: 새로운 문제점

1980년대 후반 이후 한국정치의 민주화와 노동의 활성화에 밀려 우리 기업들이 대거 해외로 진출한 사실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자원개발, 건설, 무역 분야에 한정되어 있던 과거의 해외투자자본과는 달리 최근 몇 년간 해외로 진출한 한국자본은 노동집약적 산업을 선호하고, 중소규모를 넘지 못하며, 노동억압적 저임금 국가에 집중되는 특성을 지닌다. 1990년을 전후하여 신발과 봉제 업종의 중소업체들이 동남아와 중남미로 진출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초창기 진출대상국들에서 임금이 상승하자, 외국인 투자가들에게 문호를 개방한 중국과 베트남 등 새로운 저임금국가로 투자가 집중되고 있다. 한국의 해외투자자본은 업종, 규모, 투자대상국에 기인하는 적지 않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노동집약적 업종과 중소규모라는 특성은 현지 노동자들에게 저임금과 열악한 작업환경을 강요하였고, 권위주의 또는 사회주의 국가로의 집중현상은 평화롭고 유연한 노사관계의 확립을 저해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현지국가-한국자본-현지노동간의 관계는 (자본과 노동의 국적 여부를 따지지 않는다면) 본질적으로 과거 6,70년대 한국 내에서 형성되었던 노․사․정 관계와 상당히 유사한 측면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이 연구는 해외진출기업의 노사관계의 실상과 최근의 변화를 현지조사를 통해 직접 확인해 보고 그 문제점을 알리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 연구의 조사대상지역으로 인도네시아를 선정한 것은 인도네시아가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단연 중요한 연구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인도네시아는 한국의 노동집약적 자본이 최초로 그리고 집중적으로 투자되었던 국가였다. 1994년 중국에 그 자리를 넘겨 줄 때까지만 해도 인도네시아는 한국의 중소자본이 제일 선호하는 투자대상국이었다.

둘째, 한국인 기업의 진출은 인도네시아의 노동운동사에 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도 한국기업의 노사관계 연구는 중요성을 지닌다. 한국기업의 진출과 인도네시아 노동의 활성화는 그 시점이 묘하게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노동부문은 수하르또가 집권한 1966년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는 사실상 동면상태에 들어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이 되면서 인도네시아의 노동운동은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인도네시아에 진출을 시작한 한국기업들은 불과 2,3년 만에 한결같이 노사분규에 휘말려 들었고, 이 시점은 바로 노동운동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때이다. 1992년부터 1994년 상반기까지 현지언론에는 한국인 투자기업에서 발생하는 분규사태가 끊임없이 보도되었다. “노사분규는 곧 한국기업”이라는 등식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1

이러한 연구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 진출 한국기업의 노사문제는 지금까지 한번도 본격적인 조사나 연구의 대상이 된 적이 없었다. 학술적인 연구가 부재한 것은 물론이고 우리 언론에 심층적으로 보도된 적도 없었다. 이 연구는 필자, 참여민주사회시민연대(참여연대) 간사 김은영과 회원 전제성, 홍콩소재 아시아 지역 노동정보 센터인 AMRC(Asia Monitor Resource Centre) 연구원 차미경이 1995년 7월 9일부터 30일 사이에 한국기업들이 집중되어 있는 자카르타 지역과 동부자바 수라바야에 머물면서 인도네시아 노동자, 한국인 경영자 및 중간관리자, 노동운동가, 현지교민 등을 대상으로 실시한 면접조사에 근거하고 있다. 2 면접대상자들이 노사문제와 관련하여 자신들을 정당화하고자 표명한 일방적 평가, 과장이나 거짓말은 가능한 한 배제함으로써, 객관적인 사실만을 자료로 취합하고자 노력하였다. 우선 신문보도와 노동자 진술을 통해 문제가 있는 기업을 선정한 뒤, 해당기업에 취업하고 있거나 취업한 적이 있는 노동자들을 재차 면담하고, 그 사실을 토대로 그 기업의 한국인 경영자나 관리자를 만나 사실여부를 재확인하는 절차를 거쳤다. 이러한 절차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사실제시 및 평가와 경영자들의 그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이 간극은 필자에게 중요한 생각거리를 제공해 주었고, 이 논문은 바로 이 간극에 대한 필자의 사색과 분석에 기초하고 있다.

필자는 현지조사 과정에서 매우 놀랍고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한국인 관리자에 의해 “한국적 경영방식”이 많은 기업체에 두루 도입되고 있고, 이에 대한 비판적 담론이 인도네시아 노동자들, 나아가 일반 국민들 사이에 예상보다 훨씬 넓게 확산되고, 깊게 침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한국인 관리자들은 대부분 한국에서 생산직 기술자나 노동자로 종사했던 사람들로서 인도네시아에 투자한 한국기업 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기업이나 대만, 홍콩 등 다른 외국인 투자 기업에 취업하여 관리직을 담당하고 있는 데, 이들이 사용하고 있는 관리방식은 과거 한국의 노동집약적 수출기업에서 볼 수 있었던 억압적이고 강도 높은 방식이며, 이 방식은 현지 노동자들에 의해 “한국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하여, 첫째 한국자본의 해외진출뿐만 아니라 한국인 경영인이나 관리자의 현지 취업도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으며, 둘째 인도네시아인들은 강도 높은 노동, 반노예적 생산관리, 억압적인 노동통제 등을 “한국적 경영방식”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은 나름대로 저항의 무기의 하나로서 비판적 “담론”(discourse)을 형성하여 한국인과 한국적 경영방식에 도전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자 한다.

Factory door

 2. 한국기업의 인도네시아 진출과 한국인 기업의 노사관계: 시기별 고찰

한국의 해외투자는 인도네시아와 오래되고 깊은 인연이 있다. 한국의 해외투자 제1호가 1 968년 인도네시아 원목사업에 투자한 남방개발이란 회사였으며, 남방개발은 유전개발을 위해 엄청난 자금을 한국정부로부터 지원받았다. 1987년 여름 노동자대투쟁 이후 경쟁력을 상실한 저임금, 노동집약적 산업이 맨 처음 그리고 대거 몰려간 나라도 인도네시아였다. 아래에서는 시기별 유형과 그 유형이 노사관계에 미친 영향을 살펴 본다.

한국의 대 인도네시아 투자는 시기가 변함에 따라 그 유형의 변화를 보여 왔다. 우선 진출초창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말까지 한국인 투자는 인도네시아의 천연자원을 개발하기 위한 투자가 대종을 이루었다. 당시 한국인 투자자들은 국내의 경제발전과 건설에 필요한 목재, 원유, 석탄 등을 해외에서 확보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투자를 따라 인도네시아로 간 한국인들은 소수의 기술자와 노동자들이었으며 이들의 활동지역은 수도 자카르타나 자바가 아닌 외방도서였다. 현재 인도네시아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계 기업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꼬데꼬(Kodeco)와 꼬린도(Korindo) 그룹이 목재를 기반으로 하여 거대기업군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시기가 남긴 중요한 유산이다. 이 첫 시기에 진출한 기업들은 그 수가 많지 않았던 까닭에 현지 노동자나 주민들과의 심각한 마찰이나 갈등은 없었다. 오히려, 오지였던 투자지역에 도로, 학교, 회교사원, 교회 등을 건설하고 지역경제발전에 기여하여 현지 주민들로부터도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같은 시기에 한국의 미원기업은 인도네시아에 현지공장을 설립하여 아지노모토(Ajinomoto) 및 사사(Sasa) 등 선발업체와 치열한 시장쟁탈전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현재 미원은 아지노모토와 나란히 조미료 및 가공식품 시장을 주도하는 업체로 자리를 굳혀, 꼬데꼬 및 꼬린도와 함께 현지에서 출현한 한국계 3대 기업군에 속한다.

<표 1 > 인도네시아에 대한 외국인 투자 누계, 1 9 6 7년 – 1 9 9 5년 5월 3 1일 (허가기준, 액수=백만 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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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BKPM (Badan Koordinasi Penanam Modal); 필자의 계산

두 번째 시기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로 건설과 무역 분야로의 진출이 두드러진 시기이다. 국내유수의 건설회사와 상사들이 대거 인도네시아 시장에 침투하여 눈부신 활약상을 보였다. 한편, 이 시기 동안 제1기에 진출했던 자원개발업체들에게는 갖가지 수난과 불운이 뒤따랐다. 초기에 큰 성공을 거두었던 원목업자들은 1970년대 말부터 시행되기 시작한 원목수출 제한조치로 인해 큰 타격을 받았고, 급기야 원목수출이 전면 금지된 1984년에 이르러서는 인도네시아에서 국내 판매선을 구축하거나 합판제조업으로 다변화한 극소수의 기업을 제외하고는 도산하거나 다른 업종으로 전환을 도모하게 된다. 또한 한국정부의 막대한 지원을 받아 원유탐사에 나섰던 꼬데꼬도 상업적 가치가 있는 유전을 개발하는 데 실패하여 한국 여론으로부터 집중적으로 비판을 받고 한국 정부에 의하여 관리기업으로 지정되는 등, 큰 곤욕을 치러야 했다.

이 두 번째 시기에도 한국자본-현지노동간의 관계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투자업종이 주로 노동집약적이지 않은 건설, 무역, 에너지개발 등의 분야였고, 대부분 대규모 재벌기업인 한국의 모기업이 잘 받쳐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 한국과 한국인들의 이미지는 인도네시아인들에게 긍정적으로 부각되고 있었다. 현대건설이 자카르타와 보고르를 잇는 자고라위(Jagorawi) 고속도로를 인도네시아 최초의 고속도로로 건설함으로써 인도네시아인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심어 주었고, 한국의 많은 건설업체들이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대규모 건설공사들을 수주하였다. 미원이 아지노모토와 경쟁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 한국상품의 이미지는 일반 소비자에게도 인식되기 시작하였고, 이는 1980년대 인도네시아에 진출하기 시작한 한국의 전자제품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80년대 한국인들이 획득한 긍정적인 이미지는 대체로 한국의 급속한 경제성장과 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 개최를 전후한 시기에 한국을 자주 보도한 언론방송매체를 통한 간접적인 것이었고, 직접적인 접촉이나 경험을 통한 인식은 극히 일부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제한된 것이었다.

세 번째 시기는 1980년대 말부터 1993년 정도까지로 노동집약적 분야에 대한 직접투자가 그 대종을 이룬다. 이 시기는 인도네시아 노동력이 제공하는 이점, 즉 유순함과 저임금 활용을 목적으로 한 중소자본투자에 의해 주도되었다. 특히 이 시기의 초기에 해당하는 1990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해외진출업체들이 대거 인도네시아로 몰려가기 시작하여 현재에는 350개 정도의 한국인 투자기업이 있고, 이 중 신발과 봉제가 주력을 이루는 노동집약적 제조업체만도 200여 개를 상회한다. 프로젝트당 투자규모는 한국기업이 다른 외국인 투자자들에 비해 가장 작으며(<표 1>), 이는 한국인의 투자가 얼마나 중소자본에 편중되어 있었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표 2 > 인도네시아에 대한 한국인투자 추이 (허가기준, 액수=백만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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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BKPM (Badan Koordinasi Penanam Modal); 필자의 계산

이 시기는 앞서 언급한 대로 한국자본과 인도네시아 노동간의 갈등이 표출되어 급속히 악화된 시기이다. 이 연구가 그 대상으로 삼은 기점도 바로 1980년대 후반이다.

그러나 <표 2>에서 반영되는 바와 같이, 1990년대 들어 인도네시아의 임금이 큰 폭으로 상승하면서 중소자본 진출은 그 막을 내리고 투자규모가 대형화하고 있다. 3 노동집약적 업종에 대한 신규투자는 인도네시아에서는 거의 중단된 상태이고 이제 중국, 베트남, 서남아시아 국가 등 더 임금이 더욱 싼 국가로 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기업들에 대한 나쁜 이미지가 인도네시아인들 사이에서 불식되기는커녕 오히려 확대되고 있었다. 왜 그런가? 자본은 대규모화하거나 기술집약화하고 있는 데, 한국기업과 한국인들이 여전히 악명을 유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다른 글에서 투자업종과 투자규모의 측면에서 한국인 해외투자가 본래적으로 문제를 가질 수 밖에 없음을 지적한 바 있다. 생산비용에서 임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고, 장기적 이윤회수를 도모할 수 없는 이들 중소기업들은 노사간 갈등에 쉽게 노출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한국의 경제발전 및 해외진출 단계에 비추어 볼 때 한국기업에 빈번한 노사분규는 불가피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결국 해결될 것이라는 낙관론을 쉽게 편다. 그러나 필자는 한국기업의 해외진출과 관련하여 야기되고 있는 문제는 비단 자본의 규모와 성격에서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고, 한국적 경영방식이나 기업문화가 자본과 함께 ‘수출’된 이유도 크다는 점을 아울러 지적한 바 있다. 이번 현지조사를 통하여 필자는 바로 이 한국적 경영방식이 인도네시아에서 부활하여 노사관계를 악화시키는 주범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3. “한국적 경영방식”의 실체

이번 현지조사를 시작하면서 조사팀은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한국기업들이, 언론에서 보도되고 흔히 알려진 대로, 임금체불, 최저임금제 불이행, 강제잔업, 폭력, 체벌, 폭언 등 노골적인 형태의 탈법적 행위와 노동통제를 여전히 계속하고 있는가에 관심을 가졌다. 중소기업의 자금난에서 파생되는 임금체불, 인도네시아 국가의 비호 하에 자행되는 각종 노동법규 위반 사례, 그리고 한국인 관리자들이저지르는 폭력 등이 우리가 언론을 통해 수도 없이 접한 바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기대(?)는 불과 며칠 만에 여지없이 무너졌다.

우선 저임금이나 체불임금 등 임금문제에서 파생되는 분규 사례는 예상보다 훨씬 적었다. 1994년 4월 메단의 노동자 집단시위에 놀란 정부는 최저임금 준수 여부에 대한 감시를 강화한 바 있다. 4 우리가 만난 노동자들이 취업한 한국인 업체나 우리가 직접 방문한 업체 중에서 최저임금 이상을 지급하지 않는 기업은 없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같은 업종에서 한국인 투자업체가 대부분의 외국인 투자업체와 현지인 업체보다도 높은 임금을 지급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5 노골적 폭력도 사라졌다. 뒤에서 상술하는 바대로 협박, 모욕적 행동, 폭언은 여전히 심각한 문제였지만, 직접적이고 신체적인 폭력을 당한 노동자는 만나 보지 못하였다. 한국인 경영자들이나 관리자들도 이제는 신체적 폭력은 말할 것도 없고 머리를 만지거나 쓰다듬는 행위조차도 인도네시아인들에게는 모욕적 행위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새로운 관리자, 기술자, 노동자들이 한국에서 올 때 마다 경영진은 이 점을 강조하고 교육을 시킨다고 하였다. 또한 적게는 2명에서 많아도 2,30명 정도에 불과한 한국인 관리자들이 수백, 수천 명의 노동자들을 지휘, 감독하는 작업현장을 목격하였을 때, 아무리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이 유순하다 할지라도 이들을 향해 노골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보복의 위험이 너무나 크게 보였다. 6  한국 언론에 보도되었던 것처럼, 입사시 체력검사를 한다는 기업 이야기도 듣지 못했고, 팔굽혀펴기, 뜀박질, 땡볕에 벌세우기 등 각종 체벌을 경험했거나 얘기를 들었다는 노동자도 만날 수 없었다. 아마도 사라졌거나, 과장된 보도였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다만, 좀도둑질을 막기 위해 몸수색을 하던 관행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고, 지각한 노동자에 대해 일을 주지 않고 구석에 몇 시간 차려 자세로 서 있게 한다는 증언을 한 노동자들을 만난 적도 있었다. 7

Management

둘째, 이하에서 상술할 많은 구체적인 방식들은 한국인들에 의해 인도네시아에 도입된 것들이었다. 비록 그 방식이 인도네시아의 노동집약적 업종 대부분에 널리 확산되어 있지만 인도네시아에 이를 처음 적용한 사람들은 한국인 경영자와 관리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인도네시아 신발산업은 한국 자본에 의해 육성되었다. 진출초기에 거의 모든 신발업체들은 노사분규에 휘말렸고,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이 이 갈등의 요인을 자본의 논리에서 찾기 보다는 “한국사람”이라는 민족성에서 찾으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우며 또 효과적인 운동전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한국적 경영방식과 한국인 생산관리자 및 중간관리자들은 밀접한 관계에 있다. 한국인 중간 관리자들 대다수는 한국에서 생산직 또는 기술직 노동자로 근무한 자들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들은 한국에서는 경영인 또는 관리자들로부터 강요 받았던 방식을 이제는 강요하는 위치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들에게서 보여지는 중간관리자로서의 애매한 위치, 타문화 속에서 느끼는 정신적 압박감, 제한된 교육배경에서 나오는 각종 편견, 한국인의 보편적인 자민족중심주의와 인종주의 등의 여러 특징들은 서로 복합적으로 결합하여 이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배운 관리방식을 현지 노동자들에게 강요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진행되고 있는 한국 자본과 한국인 경영의 분리 현상의 결과를 들 수 있다. 신발, 봉제, 섬유, 완구 등 중소 제조업체에서 그 소유의 국적을 불문하고 한국인 공장장, 작업반장, 조장 등을 두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었으며, 이럴 경우 업체들의 실제 소유주는 한국인이 아닌데도 한국기업으로 알려져 있는 수가 많았다. 노동자들이 일상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이 한국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적 경영방식의 정체성을 확립시켜 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적 경영방식은 한국인이 소유, 경영, 관리하고 있는 기업에서만 적용되고 있다고 보기 힘들었다. 면접대상자들, 특히 한국인들은 대만, 홍콩, 기타 중국인 기업은 더 “악랄하게” 노동자들을 관리한다고 항변하였다. 다만 우리의 현지조사가 한국 기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한국적 경영방식이 현지기업이나 다른 외국인 기업에 얼마나 널리 확산, 침투되어 있는지는 직접 확인해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한국적 경영방식의 실체나 기원을 떠나 그 비난이 한국을 향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심각한 현상이며, 중요한 문제의식을 던져 준다 하겠다. 한국인이 소유한 회사든, 공장장만 한국인인 회사든, 중간관리자가 한국인인 회사든, 착취성의 책임은 바로 그 회사의 “한국부분”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아니라 한국사람들이야말로 바보들”이라고 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필자의 귀에는 결코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이하에서는 한국인이 투자, 경영, 관리하는 기업들에서 널리 행해지는 관행들을 최근의 변화를 중심으로 정리해 본다. 자료로는 면접조사기록과 언론보도를 이용하였다.

( 2 ) 임금체계

최근 몇 년 간 인도네시아의 임금체계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한국인 경영자들은 이 변화기의 혼란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었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회사의 임금체계를 변화시킨 가장 중요한 요인은최저임금제 준수여부에 대한 국가의 통제와 감시가 최근 크게 강화된 점이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지난 몇 년 간 노사분규의 급격한 증가를 정치적 안정을 위협하는 중대한 요소로 규정하고 이에 대해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사용하는 방식으로 이에 대처하여 왔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노동자들에게 제공한 “당근”은 최저임금제 보장과 최저임금액의 인상이다. 지난 몇 년 간 최저임금은 해마다 큰 폭으로 인상되어 왔고(<표 3> 참조), 지난 1994년 메단 사태 이후 최저임금제를 지키지 않는 기업에 대해 소위 “블랙리스트”를 작성하여 감시와 감독, 그리고 처벌을 강화하였다. 8

한국인 투자자나 경영진은 인도네시아 정부의 노동정책을 박정희 정권의 노사정책과 유사한 것으로 흔히들 생각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종종 자신들의 사업을 그르치는 단순하고 위험한 사고의 소치이다. 우선 수하르또 정부의 노동정책은 소위 노-사-정이 평화적인 협의를 통해 합의를 이끌어 내는 “빤짜실라 산업관계”(Hubungan Industrial Pancasila)에 기반을 두고 있는 데, 이는 한국의 과거 억압적 노동정책과 달리 수사학 이상의 것이다. 9  수하르또 정권은 경제발전보다 정치적 안정에 훨씬 더 우선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심각한 노사갈등으로 노동자들이 정치화되고 이것이 시민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어 정권을 위협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따라서 외국인 투자와 성장률이 다소 감소하더라도, 임금인상을 통해 노동자들의 불만을 줄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이는 인도네시아의 발전전략이 노동집약적 수출지향 산업화에만 의존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10

둘째, 한국인 기업들은 한국 내에서는 국내기업이었지만 인도네시아에 온 뒤로는 외국인 투자 기업이 되었다는 사실을 종종 망각하는 것 같다. 인도네시아의 경제정책은 최근 자유화와 합리화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 외국인 투자 기업의 노사분규는 단순한 노자간의 갈등이 아니라 민족간의 갈등일 수 있으며, 이것이 인종폭동으로 비화한 예도 1974년 1월에 있었던 대규모 반일폭동이나 간간히 발생하는 반화인(중국인) 폭동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외자기업에 대해 베푸는 특혜는 결코 무조건적이지 않다.

<표 3 > 자카르타와 서부자바 지역의 최저임금(UMR ) (1 ) 인상 추이 (단위: 루삐아)

주: (1) 1990년 이전에는 최저임금에 “수당”(allowances)이 포함되지 않았음. (2) 한국기업이 많이 집중되어 있는 공단지역인 보고르, 땅그랑, 버까시, 반둥 지역에만 해당. (3) 이 연구의 조사대상지역인 수라바야를 포함하여 말랑, 시도아르조, 그 레식, 빠수루안, 모조꺼르또 등 대도시 지역에만 해당. 출처: 파우지 압둘라(Fauzi Abdullah) 제공.

주: (1) 1990년 이전에는 최저임금에 “수당”(allowances)이 포함되지 않았음.
(2) 한국기업이 많이 집중되어 있는 공단지역인 보고르, 땅그랑, 버까시, 반둥 지역에만 해당.
(3) 이 연구의 조사대상지역인 수라바야를 포함하여 말랑, 시도아르조, 그 레식, 빠수루안, 모조꺼르또
등 대도시 지역에만 해당.
출처: 파우지 압둘라(Fauzi Abdullah) 제공.

한국인 경영자들은 최저임금의 지속적인 인상 조치를 그대로 받아 들이지 않았다. 한국기업은 이에 대체로 세가지 방향으로 대처하고 있다. 첫째는 임금수준의 일률적 획일화이다. 최저임금을 지급함으로써 늘어난 임금부담을 상쇄할 수 있도록, 근무년한에 따른 임금격차를 없애거나 줄여 버리는 것이다. 아예 일률적인 임금수준을 책정하는 기업들도 있었고, 장기근속자에 대한 차별적 임금지급을 줄여 버린 기업들도 있었다. 이러한 임금체계의 획일화는 새로운 분규의 씨앗이 되고 있고, 실제 파업으로 이어진 예도 흔하다. 11

 둘째는 따로 지급하던 식대나 교통비를 임금에 포함시켜 실질적인 임금상승폭을 줄이는 것이다. 이 문제는 법규 해석을 둘러싸고 논쟁의 대상이 되어 온 부분이다. 1990년 이후 채택된 최저임금제는 최저임금의 25퍼센트를 수당(allowance)으로 포함시킬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 회사가 지급하는 임금이 식대와 교통비를 수당으로 계상하고, 이를 포함시킬 때 최저임금액을 넘어 서면 엄격히 최저임금제를 위반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다수 기업들은 지급하는 임금에서 식대와 교통비를 제하거나, 임금을 최저임금 수준에 맞춰 인상하는 대신 과거 지급하던 식대와 교통비를 줄이거나 없애는 방식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계산방식의 채택은 1990년대 들어 많은 노사분규를 발생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2 물론 노동단체들은 식대와 교통비를 수당으로 계산하지 말고 추가로 지급해야 된다는 해석과 주장을 하고 있다.

셋째는 도급제와 성과급제의 채택이다. 한국기업들은 최근 임금이 인상된 만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고안해내고 또 채택하고 있다. 그 중의 하나는 도급제이다. 한국기업들은 철저한 경쟁과 시장의 원리를 도입하여, 원하는 노동자에게 생산도급제를 적용하여, 노동시간과 관계없이 생산량에 따라 임금을 지급받도록 하는 방식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시간제 노동자들이 최저임금과 잔업수당을 합해 월 평균 20만 루삐아를 받는 데 비해, 도급제 노동자들은 월 평균 30만 루삐아를 받고 있다. 도급제 노동이 훨씬 과중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아직 이 방식의 착취적 성격에 대해 조직적 저항이나 거부를 한 예는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노동운동 관련 노동자를 포함하여 회사 측이 싫어하는 노동자들에게 도급제를 불허함으로써 징벌수단으로 쓰는 회사도 있었다. 13

또 하나의 방식은 목표량을 설정하여 성과급을 지급하거나 벌과금을 물리는 방식이다. 이 경우에는, 목표량을 달성할 수 없을 정도로 과다하게 높게 책정하여 사실상 성과급 수당은 지급하지 않고 생산성을 높이는 방안을 예상할 수 있다. 실제 이런 성과급제 노동을 채택하고 있는 공장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목표량 생산방식의 효과를 의심스럽게 하며, 이에 대한 노동자들의 반발 또한 크다. 또한 최근에는 목표량 미달성에 대해 가하던 벌금은 없애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앞으로는 목표량을 적정수준으로 낮춰 생산성을 효과적으로 높이는 방향으로 움직여 갈 것으로 예상된다.

Old calculator on white background showing text "wage" in perspe

마지막으로 언급되어야 할 것은 임금 계산방식과 내역을 분명하게 하지 않는 점이다.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이 지급받는 임금은 도급제, 성과급제, 시간외 근로, 식대, 교통비, 하리라야 보너스(THR: Tunjangan Hari Raya; 하리라야는 회교도의 금식기간인 라마단Ramadan이 끝난 다음 날로서 인도네시아의 가장 큰 명절임), 생리휴가 등 복잡한 요소가 합해져 책정된다. 지급된 임금의 산정방식에 대한 의구심은 노사분규의 주된 요인이 되어 왔다. 임금체계의 복잡함과 노동자의 무지를 이용한 정직하지 못한 임금계산의 경우도 물론 있었겠지만 이를 인정하는 회사는 물론 없었다. 정직성 여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인 경영인들이 임금계산방식을 명확하게 설명하거나 이에 대한 의구심을 설득과 대화로 풀려고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확실하고 정직하게 계산했으면 그만이라는  사고가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통할 리 없다. 금전문제의 민감성, 임금구성요소의 복잡함, 연장근로 임금의 다른 적용률, 무엇보다도 한국인 직원에 대한 광범한 불신은 임금에 대해 더욱 분명한 설명을 요구한다. 그러나 한국인 경영자와 관리자는 언어장벽과 고압적 태도로 인해 쓸데없는 오해를 사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임금체계의 변화와 관련하여 앞서 언급한 도급제의 채택이 시사하는 바는 중요하다. 직접 목격한 한 예를 들어 보자. 필자와 조사팀이 방문했던 KBN보세공단의 CJ봉제업체는 잦은 노사분규로 인해 재래의 노골적 노동통제방식을 포기하고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고 있었지만 그리 성공적으로 보여지지 않았다. 사장 겸 공장장과 공장을 직접 통제, 관리하는 두 명의 이사를 제외하고는 중간관리자나 사무직원들을 모두 현지인으로 바꿔 버렸다는 이 기업은 도급제(borongan) 생산방식을 도입하고 있었으며, 이를 큰 자랑거리로 여기고 있었다. 도급제 생산방식은 시간당 임금이 아니라 생산량당 임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더 많이 생산할수록 더 많은 임금을 받게 되는 방식을 일컫는다. 그러나 CJ기업에서의 도급제 생산노동은 매우 비인간적인 것이었다. 동일한 공간 안에서 다수의 시간제 임금반과 소수의 도급제 임금반이 구분되어 있었고, 도급제 작업반의 여공들은 선 자세로 땀을 뻘뻘 흘리며 “한국에서는 남자 밖에 할 수 없는”(사장의 말) 스웨터를 짜는 수동식 기계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 바로 옆에는 조는 듯이 보이는 고정임금제 노동자들이 느릿느릿 손으로 스웨터를 짜거나 짠 스웨터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양자간의 임금격차는 월평균 10만 루삐아(3만원 정도)라고 하였다. 우리를 맞는 노동자들의 표정에서 다른 공장에서 볼 수 있었던 호기심 어린 태도나 인도네시아 특유의 미소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인도네시아인들의 노동관습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협동과 상호부조(gotong royong)의 전통이나 “가난을 공유”(shared poverty)하는 평등지향적인 말레이문화로 비춰 볼 때, 이 도급제 노동은 어떤 의미를 현지 노동자들에게 던져 줄까? 상호부조가 아닌 경쟁, 바로 옆자리의 동료들보다 더 50퍼센트나 많은 임금을 받기 위한 노동, 그리고 너무나 대조적인 작업 모습은 어쩐지 거북하고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이 스웨터 공장 노동자들의 무표정은 도급제 생산방식으로 나타난 자본주의에 의해 밀려날 수 밖에 없는 인도네시아의 평등주의적 전통과 문화를 체념한 얼굴 같았다. 임금시장과 국가의 임금정책의 변화에 따른 한국인 경영자들의 대응은 위에 논의한 임금체계의 변화로 나타나고 있다. 이 변화는 최저임금제 위반, 저임금, 시간외근로수당 불인정, 임금체불 등 명확한 부당행위를 대신해 좀 더 은폐되고 복잡한 임금체계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새로운 임금체계의 의미를 모른다고 경영자들이 단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새로운 임금체계는 강제적으로 상승된 임금비용을 상쇄시키기 위해 노동강도와 생산성을 높이려는 의도를 감추고 있음을 노동자들은 쉽게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A Korean factory in Indonesia

A Korean factory in Indonesia

( 3 ) 노동강도와 노동시간 

한국적 경영방식의 핵심은 노동강도를 높이는 방식들을 통한 노동생산성의 제고로 요약된다. 자동화에 대한 의존도가 낮고 단순노동 정도를 필요로 하는 노동집약적 제조업종에서는 노동의 양이 질보다 우선된다. 따라서 짧은 시간 안에 최대의 노동량을 집중시키는 것이야말로 생산성을 증대시키는 지름길이 된다. 한국인 관리자들이 채택하는 방식은 거의 예외 없이 이러한 방식에 의존하고 있다. 노동강도의 강화는 각종 노동시간 연장책에서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한국기업들은 노동시간을 늘이기 위해 여러 가지 교묘한 방식들을 쓰고 있었다. 첫째는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이 “시간 훔치기”(korupsi waktu)라고 부르는 것으로 7시간 노동시간 외에 작업개시와 종료 시각을 전후하여 짧은 시간을 덧붙여 작업을 강요하는 방식이다. 작업시작 시간 15분 전에 출근하게 하여 곧 작업에 임하게 하거나 퇴근시간을 5분 정도 늦추고, 휴식시간이나 점심시간을 조금씩 줄여 결과적으로 노동시간을 늘이는 것이다. 어떤 한국인 회사는 잔업시간을 “훔치고” 있었는데, 30분이 넘지 않은 잔업은 시간외 근로로 인정해 주지 않고 따라서 수당을 지급하지 않고 있었다. 14

둘째는 작업 중 상실하는 시간을 줄이는 방법이다. 그 중에서도 한국기업들에 광범하게 확산되어 있는 것은 자유로운 화장실 출입을 금하는 것이었다. 화장실 출입 통제로는 갖가지 기발한 방법이 동원되고 있었다. 한국기업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통제 방식은 “화장실 출입용 카드”를 발급하는 것이다. 이 방식은 이 카드를 소지한 노동자에게만 화장실 출입을 허용하는 데, 문제는 극소수의 카드만을 발급하여 이를 돌려 가면서 쓰게 하고 모든 카드가 사용 중이면 화장실을 간 사람이 돌아 올 때까지 기다리게 한다는 것이다.

화장실 통제를 하는 또 다른 방식은 화장실 수 자체를 줄이는 것이다. 한국의 유수 재벌기업인 K가 합작투자한 K1이라는 회사는 500명 이상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었는데, 화장실 출입 카드는 사용하지 않는 대신 6개의 화장실을 지어 놓고도 3개는 항상 수리 중이라며 잠가 놓은 채, 사용 가능한 3개도 남자용이 2개이고 여자용은 1개만 사용할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래서 90퍼센트 이상이 여성 노동자인 이 공장에서는 여공들도 남성용 화장실을 사용하며, 남자들은 바깥 벽에 방뇨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15

화장실 사용 시간을 줄이기 위해 사용하는 가장 비인간적인 방법은 화장실 개방 시간을 정해 놓고 지정 시간외에는 아예 화장실 문을 잠궈 버리는 것이다. 위에 언급한 K1 공장은 오전 30분, 점심시간 1시간, 오후 30분만 화장실을 개방하고 그 외 시간은 화장실이 항상 잠겨 있다고 한다. 화장실 사용과 마찬가지로 기도 시간을 줄이려고도 회사들은 애쓰고 있었다. 가장 손 쉬운 방법은 기도실(musholla) 수와 공간을 늘이지 않는 것이다. 만족할 만한 수준의 기도실 시설을 갖춘 한국 기업체는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노동상실 시간을 줄이기 위해 한국기업들이 채택하는 더욱 끔찍하고 위험한 방식은 작업시간 중에는 아예 공장건물 문을 열쇠로 채워 놓는 경우이다. 이는 화재의 위험, 고온, 먼지, 유해물질에 노동자들을 노출시키는 실로 잔인한 행위로서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의 깊은 분노를 사고 있었다. 16아직도 일부 공장에서는 시간외 근로의 강제로 물의를 빚고 있다. 강제잔업은 진출 초기 한국기업들에서 발생하는 노사갈등의 주요 요인이었다. 시간외 근로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나 시간 훔치기에 대한 분명한 인식에서 볼 수 있듯이 인도네시아인들과 여타 동남아인들은 휴식과 여가를 매우 중시한다. 과거 인구증가가 시작되던 18세기 이전 동남아문화는 풍요로운 자연과 희소한 노동력이란 환경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는데, 이는 여가생활, 놀이문화, 의례 등을 매우 중시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17노동도 여가를 위한 것이었다. 초기에 동남아로 진출했던 한국인들은 임금지급일 뒤에 갑작이 높아지는 결근률에 놀랐던 것도 동남아인들의 여가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탓이었다. 한국인 경영인이나 관리자들은 인도네시아인들이 시간관념이 희박하다든지 또는 과거 자신들처럼 항상 돈을 여가에 앞세울 것이라고 생각하여, 시간을 훔치고 잔업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폭력, 체벌, 협박에 의존했던 진출 초기의 강압적 생산관리방식은 이제 대부분 사라졌지만, 노동강도를 높임으로써 생산성을 향상시키려는 원칙은 그 구체적인 방식이나 형태만 바뀐 채 변함없이 고수되고 있는 것이다.

( 4 ) 후생복지와 작업환경

한국인 경영자들은 대체로 작업안전도, 후생과 복지, 그리고 이를 보장하는 각종 시설에 대해 인식이 부족한 편이다. 한국에서 자신들이 경험한 바가 그러했고, 특히 한국인들은 인도네시아인들의 낮은 생활수준에 비추어 이러한 것들은 일종의 사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이 지나자 임금이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최저임금제가 비교적 잘 지켜지는 반면, 작업안전시설, 직업병, 보험, 의료, 기숙사, 식사 등 작업환경과 후생과 복지, 편의시설 등에 대한 개선 요구가 파업이유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고 있다. 18또한 이는 최근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시민단체(LSM: Lembaga Swadaya Masyarakat, 민간자활기관; NGO: Non-Governmental Organization, 비정부기구)가 노동문제에 관심을 보여, 노동자에 대한 권리찾기 교육을 강화해 온 결과이기도 하다.

최근 한국의 선경그룹과 인도네시아의 굴지의 섬유재벌인 바띡끄리스(Batik Keris)가 합작한 (주)선경끄리스(Sunkyong Keris)는 현대식 공장시설과 기계, 기숙사, 출퇴근용 냉방버스, 고임, 인간적 대우로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이 가장 선망하는 공장 중의 하나이지만 이런 작업환경과 조건은 극히 예외적인 것에 속한다. 많은 공장들이 부대시설들을 갖추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노동자들이 만족할만한 실질적인 편의나 혜택을 제공하고 있지 않는 점에서 차라리 전시용에 가깝다. 식당을 지어놓고 식사를 제공하기는 하지만, 식당이 매우 불결하거나, 맛과 재료가 형편 없거나, 심지어는 냄새가 나고 상한 음식을 제공하거나, 식수를 공급하지 않는 등 식사와 관련된불만요인이 시위를 야기하고 있었다. 19 앞서 얘기 했듯이 턱없이 부족하게 화장실을 만들어 놓든지, 아니면 아예 문을 잠가 놓는다. 한국인이 공장장으로 있는 중국인 소유 자켓봉제공장 한곳(SA)에서는 화장실 지붕에서 물이 떨어져 바닥에 고여도 몇 달을 고치지 않고 놓아둔다고 하였다. 통근버스도 문제점의 하나로 지적되고 있는데, 잔업으로 한밤중에 작업이 끝나는 데도 통근버스를 제공하거나 교통비를 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노사분규가 심각했던 신발공장 EIF사의 경우에는 노동자가 6,500명인데 출퇴근버스는 50명 용 40대만 운행하고 있었다. 북부 자타르타에서 땅그랑으로 이전한 한 가구공장(SPJ)은 기숙사가 없어 따라 올 수 없는 노동자들이 충분한 교통비를 지급해 달라고 하자 이들을 해고해 버려 분규가 발생했으며, 이 공장은 또한 식당이 없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식사하기 위해서는 30분씩이나 걸어 나가야 하는 지경이었다.불만요인이 시위를 야기하고 있었다. 20 앞서 얘기 했듯이 턱없이 부족하게 화장실을 만들어 놓든지, 아니면 아예 문을 잠가 놓는다. 한국인이 공장장으로 있는 중국인 소유 자켓봉제공장 한곳(SA)에서는 화장실 지붕에서 물이 떨어져 바닥에 고여도 몇 달을 고치지 않고 놓아둔다고 하였다. 통근버스도 문제점의 하나로 지적되고 있는데, 잔업으로 한밤중에 작업이 끝나는 데도 통근버스를 제공하거나 교통비를 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노사분규가 심각했던 신발공장 EIF사의 경우에는 노동자가 6,500명인데 출퇴근버스는 50명 용 40대만 운행하고 있었다. 북부 자타르타에서 땅그랑으로 이전한 한 가구공장(SPJ)은 기숙사가 없어 따라 올 수 없는 노동자들이 충분한 교통비를 지급해 달라고 하자 이들을 해고해 버려 분규가 발생했으며, 이 공장은 또한 식당이 없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식사하기 위해서는 30분씩이나 걸어 나가야 하는 지경이었다.

자켓봉제공장 SA에서는 300명 가량이 기숙사에 머물고 있는 데, 기숙사 전체에 욕실(화장실 겸용: 까마르만디kamar mandi라고 불리는 데 한국 아파트의 욕실 크기 정도)을 세 개만 만들어 놓고, 아침마다 줄을 서고 발을 굴리다가 항의를 하자, 8명씩 공동으로 목욕을 하도록 강요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우리가 추측하는 것과 달리 절대로 모르는 사람 앞에서 벗은 몸을 보이는 법이 없다. 공동목욕탕이라는 게 없고, 탈의실에서도 가려진 칸에서 각자 옷을 갈아 입는다. 그런 나라에서 좁은 까마르만디에 8명씩이나 함께 목욕을 시키는 것에 대해 인도네시아 한 노동운동가는 분노의 정도를 넘어 한국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낀다고 하였다. 20

많은 회사들이 의료보험(Astek: 아스떽)을 통해 산재 노동자들을 보호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이에 가입하지 않은 회사가 많아 파업 시 요구사항의 하나로 자주 등장하고 있다. 21 그러나 아스떽에 가입하고 있는 회사도 일용직, 임시직, 견습생이라는 이름을 붙여, 짧게는 3개월 길게는 영구히, 많은 노동자들을 그 혜택에서 제외하고 있다. 사내에 보건소(klinik)를 설치하고 있는 경우에도 허가증을 받아야 치료를 받을 수 있고 약을 요구하면 절차와 승낙이 까다로워 아예 이용을 회피하는 경우가 많다. 작업환경, 작업안전도, 산재는 사회문제화되는 정도에 비해 그 실상이 훨씬 심각한 것 같다. 그러나 산재나 업무상 사망의 경우, 한국인 회사들은 크게 문제될 것이 두려워 치료나 보상에 비교적 성실한 것 같다. 또한 작업장에서의 산재는 매우 허다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일단 보상을 받게 되면 만족하는 경향이 강한 까닭에, 아직도 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한국인 기업들이 노후한 기계를 사용하는 중소기업들이고 보면, 안전사고가 많음을 충분히 예상할 수있다. 보상이 일시적인 효과가 있기는 해도 사고의 결과는 영원히 남는 것이기에, 한국인 기업이 산재피해자를 양산하는 현상은 멀지 않아 큰 문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 5 ) 노무관리와 부당해고

여러 경영분야 중에 가장 한국적이라고 할 수 있는 분야가 “노무관리”와 한국 경영자들의 노동자에 대한 통제 방식, 특히 노동조합이나 노동운동에 대한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노동운동과 노동조합에 대처하는 방식은 과거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과 흡사한 측면이 너무 많아 “한국적 방식”이 그 죄를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한국인 경영자들은 우선 노동조합 설립을 허락하지 않으려 하며, 불가피하게 노조가 결성되는 경우에도 이를 철저히 어용화하려 한다. 한국인 경영자들이 노조에 대해 갖는 강한 거부감은 한국에서의 경험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들 중소기업을 한국에서 해외로 밀어 낸 것이 바로 노동운동과 노동조합이었으며, 노동운동의 활성화가 자의적 노동통제를 불가능하게 하고 임금을 상승시킨 사실을 잘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기업들이 처음 인도네시아에 진출할 당시에는 인도네시아의 노동운동과 노동조합은 한국 투자자들이 ‘우려’할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인도네시아의 노동조합은 실제로 국가가 철저히 통제하는 전국근로자총연합(SPSI: Serikat Pekerja Seluruh Indonesia) 하나뿐이며, 이는 노조라기 보다는 관변단체로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나마 SPSI 지부를 가진 업체의 비율이 20퍼센트 정도에 불과하고, 노조 가입 업체에서도 가입노조원의 수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몇몇 자유노조 단체가 출현하기도 했으나, 정부가 초기에 철저한 탄압을 가하여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22 노사분규가 1990년대 들어 급증한 것은 사실이나, 인도네시아의 산업화 수준과 전략에 비추어 노사분규의 수는 그리 놀랄만한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표 4 참조>). 23 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의 노동운동은 대체로폭력적이거나 전투적이지 않다. 기물을 파손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고, 일손을 놓고 잡담하거나 노는 태업이나, 기껏해야 마당에 모여 구호를 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다가 경찰이나 군인들이 도착하면, 대표자를 뽑은 뒤 해산하고 대표자들은 회사측과 인력부 직원의 입회 하에 협상에 들어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한국처럼 경찰과 물리적 충돌을 했다는 예는 별로 들어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쓰라린’ 경험이 한국인 경영자들로 하여금 노사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과도하게 대처하도록 만드는 것 같다. 다시 말해, 한국에서 조직적, 지속적, 전투적 노동운동에 대처하기 위하여 동원했던 각종 비합법적, 탈법적 방법을 유순하고 비조직인 인도네시아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친 대응이 오히려 새로운 문제를 야기하고 사태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빚고 있다.

우선 노동운동 지도자라고 믿어지는 자에 대해 교묘한 탄압책이나 회유책을 구사하며, 만약 말을 듣지 않으면 부당한 방법으로 해고한다. 이번 조사과정에서도 필자는 노조결성 자체를 협박과 위협으로 막거나, 노조가 결성된 뒤에도 노조가입을 저지하고 간부를 매수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1993년 이후 한국기업의 파업을 보도한 기사들을 보면, 거의 모든 파업사례가 노조결성 허가를 요구사항의 하나로 내세우고 있거나, 노조가 결성되어 있는 소수의 파업 사업장의 경우에는 노조의 활성화를 요구하고 있다. 여기서 노조라는 것이 SPSI 지부를 말하는 것이고, 따라서 한국인 경영자들이 이 형식적인 노조조차 결성을 방해한다는 사실 – 노조설립을 방해하는 것은 위법이다 – 은 노조에 대해 얼마나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지를 보여준다.

 

<표 4 > 1 9 8 0년 이후 인도네시아 파업 추세 (연 평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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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Depnaker RI; DPP SPSI; ILO, International Yearbook of Labour Statistics, 여러호; Business News, no. 5593 (August 8, 1994)에서 재인용.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은 과거 1970-80년대 한국에서 자주 듣던 이야기와 너무나 흡사한 것이었다. 말을 듣지 않거나, 노동운동이나 파업의 주동자로 의심이 가는 노동자는 일이 힘들거나, 잔업이나 도급이 보장되지 않는 작업으로 이동시킨다. 파업사태가 일단 발생하면, 회사측은 파업노동자들을 위협하거나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경찰이나 군인들에게 부탁하여 주동자를 색출한다. 그래도 주동자를 색출하지 못하면, 희생양을 찾는다. 한국기업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중에는 자신이 왜 해고되었는지 전혀납득하지 못하는 노동자들도 있었다. 24 봉제업체 K업체에서 일하다 해고된 한 여성노동자는 한국인 관리자의 “사귀자”는 유혹을 거부하고 노동운동에 관련되어 결국 회사측의 미움을 사게 되었는데, 회사측은 그녀를 쫓아 낼 방법을 찾던 중 다른 노동자를 시켜 싸움을 걸게 했다. 그녀는 이유 없는 구타에 반항하였고, 회사측은 두 사람 모두를 불러 그 자리에서 해고해 버렸다. 회사 내규에 작업장에서 싸움을 벌인 당사자들은 모두 해고한다는 규정이 있다는 이유였다. 또한 한국의 구사대(救社隊)나 해결사와 비슷한 “쁘레만”(preman; 영어의 free man에서 유래한 것으로 거리의 깡패를 뜻함)을 동원해 노동자를 위협한다는 이야기도 들은 바 있다.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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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글(Eagle)표 운동화 제조업체 (주)가루다인다와(GI: PT Garuda Indawa)라는 공장에서는 인력부 장관이 방문할 것이라는 통보를 받고 몇몇 노동자를 뽑아 사전 연습을 시킨 뒤, 임금수준과 상여금에 관한 장관의 질문에 허위로 답변하게 한 일까지 있었다. 그리고 이 노동자들에게는 일인당 10,000 루삐아(3,500원 정도)씩 주었다. 이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파업에 돌입했다. 이 사건은 주요 일간지들에 모두 보도되었고, 한 신문은 1면 전단 기사로 취급하였다. 파업직후 회사 사장은 인력부의 담당국장에게 불려 가 경고를 받았고, 노동자들은 일주일 후 다시 파업하였다. 26

여러 차례 분규로 인도네시아 신문에 오르내렸던 한 한국인 투자업체에서 노무관리를 담당하는 한국인 직원은 비교적 솔직하게 한국인 회사들의 노무관리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경영진은 공장 설립과 동시에 경찰 및 군인과 교분을 맺어 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공원들을 충원할 때 “외부 불순세력”과 연계되지 않도록 경력 노동자는 제외시킨다는 것이다. 몇 차례 분규를 겪으면서 결국 SPSI 지부 결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나, 지부장을 총무부 직원에게 맡도록 하여 철저히어용화하였다고 한다. 이 한국인 노무관리담당자는 중소기업이 한국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주범이고, 추한 한국인 이미지를 벗기 위해서는 신발공장들을 모두 철수시켜야 한다고 까지 주장했다.

최근 많은 한국인 회사들은 노무관리를 인도네시아인에게 맡기는 이른바 현지화를 꾀하고 있다. 한 스웨터공장의 사장은 한국인 직원은 돈도 몇 배 비싸게 들고 또 분규가 발생하면 민족간의 대립으로 보여 좋지 않기 때문에, 두 명을 제외하고 모두 한국으로 돌려 보냈다고 한다. 또한 노무관리를 현지인에게 맡기면, “자기네들끼리 싸움을 벌이고, 현지인만 자르면 문제가 해결”되는 장점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사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최고 경영진이 쥐고 있는 만큼, 단순한 노무관리 수준의 현지화는 미봉책에 지나지 않으며 최종 책임은 결국 한국인에게 돌아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주요 결정과정에 인도네시아인들을 참여시키는 좀 더 진실된 경영의 현지화가 필요하다.

( 6 ) 한국인 관리자의 행태

이상에서 살펴 본 “한국적 경영방식”이라고 알려진 것들이 굳이 그 기원이나 성격까지 “한국적”인 것으로 볼 근거는 없다. 비록 그것이 한국의 과거 경험과 유사하고 한국인 투자기업에서 그리고 한국인 경영 기업에서 가장 잘 적용되고 있다고는 하나, 그것은 다른 권위주의 국가의 노동통제방식에서도 동시에 찾아 볼 수 있고, 군국주의 일본의 노동정책에서 유래했을 수도 있으며, 인도네시아에서도 홍콩이나 대만 투자 기업, 화인기업, 나아가 현지인 기업에서도 널리 확산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홍콩, 대만, 현지화인 투자기업의 경우 더욱 악랄하고 비인간적인 통제를 가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한국인 회사에서 구타나 체벌과 같은 노골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은 진출 초기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다. 물론 진출 초기에 한국인 관리자들이 자행한 폭력적 행동들은 지금까지 지워지지 않고, 한국인의 이미지 형성에 한 몫을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신체에 대한 물리적인 것만이 폭력적인 것도 아니다. 상대방의 무력함을 이용한 모욕적인 행동이나 발언도 물리적인 것에 못지 않는 폭력이다. 아직도 이러한 형태의 폭력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필자가 만난 대부분의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은 한국인들의 폭언과 욕설을 첫째로 꼽았다. 한국인들은 화가 나거나 마음만 급해지면 한국말로 하고, 그것도 고함을 지르거나 욕설을 해댄다고 했다. 한국말로 하면 모를 줄 알지만 조사팀이 만난 많은 노동자가 “새끼”, “임마”, “시발놈”(경상도식 발음) 등이 욕설이라는 사실 정도는 다 알고 있었다. 27 한 여공은 한국인 직원과 사귀게 된 후, 자기가 가장 자주 들은 한국말의 뜻을 물어 보니 전부 욕지거리거나 나쁜 말이더라고 했다.

Physical Abuse

인도네시아에 진출하여 다양한 경제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여러 나라 사람들 중 한국인들이 유독 거칠다는 점은 한국인들 스스로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욕설은 물론이고 고함, 고성, 급한 성미의 표현 따위도 인도네시아 문화, 특히 자바 문화에서는 금기시된다. 거칠다는 뜻으로 “까사르”(kasar)란 말을 사용하는 데, 이는 우리말 속에 담겨있는 남성답거나 솔직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무식, 천박, 반이성의 나쁜 의미가 담겨 있다. “한국사람은 까사르하다”(orang Korea kasar)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다. 무덥고 습한 기후 탓에 느릿느릿 걷고 말도 천천히 하는 것을 점잖은 행동으로 여기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거칠고 빠른 말로 작업지시를 하는 한국사람들을 좋게 볼 리 만무하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한국말이 “빨리 빨리”이고, 또 해외 한국인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현지어가 이것에 해당하는 말이라고 한다. 그래서 중남미에서는 “라삐도 라삐도”(rapido rapido)이고, 인도네시아에서는 “쩌빳 쩌빳”(cepat cepat)이고, 그것도 두 번 반복해서 말한다. 조급한 행동, 거친 말투, 고함 섞인 명령은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정신이상자나 하는 언행으로 취급 받기 십상이다. 인도네시아는 “협의와 합의”(musyawarah dan mufakat), 즉 ‘대화와 협의를 통한 합의’를 5대 국가철학(pancasila)의 하나로 삼고 있으며, 이 원칙은 전통적 가치규범에서 도출된 것이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을 줄 모르고, 대화할 줄 모르는 한국사람들이 인도네시아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초기에 진출한 한국인들이 가장 낭패를 당한 것은 신체적 접촉이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는 모욕적이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인도네시아인들 스스로가 이 같은 모욕을 참고 견디는 법을 가르치게 해서 우리의 낯을 뜨겁게 했다. 한국에 파견할 산업기술연수생을 모집, 송출하고 교육을 담당하는 비나완(PT. Binawan) 직업훈련원에서는 교관이 노동자 머리카락과 귀를 당기거나 뺨을 때리고, 두 사람을 서로 마주 세워 놓고 서로의 뺨을 때리고 맞는 훈련을 시키기까지 한다.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물리적 폭력은 최근 거의 사라졌고, 가벼운 신체적인 접촉 정도는 인도네시아 노동자들도 선의로 받아들인다고 한다.

그러나 모욕적인 행동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조사기간 중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이 참기 힘들다고 가장 자주 언급한 사항은 한국인들이 손이 아닌 발로 물건을 가리키고 작업을 지시하는 행동이었다. 또한 체벌은 사라졌지만, 바닥이나 화장실 청소를 시키거나, 작업장 구석에 몇 시간씩 세워 놓는 벌칙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한다. 권위주의적 교육이나 군대생활의 경험이 없고, 타인 앞에서 모욕을 당하는 일을 중대한 모독으로 여기는 말레이문화를 공유하는 인도네시아인들이 이러한 한국인들의 태도나 벌칙을 결코 정당한 것으로 받아 들이지 않을 것임은 물론이다.

보복이나 반발을 경험한 한국인 관리자들 사이에 비록 폭행은 사라졌지만 모욕적인 언행이 여전히 남아 있는 까닭은 한국인들의 의식 자체가 쉽사리 바뀌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도네시아 사람, 문화, 노동자들에 대한 일종의 인종차별적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다른 글에서 한국인의

의식 밑바탕에 깔려 있는 선민의식, 인종차별주의, 왜곡된 민족주의 등이 한국자본-현지노동간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이번 인도네시아 현지조사과정에서도 바로 이러한 한국인의 의식과 행태야말로 한국계 중소기업의 반인도주의적이고 비인간적인 경영방식의 뿌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가 이 현지조사 기간에 동시에 실시한 “인도네시아 한인사회 연구를 위한 설문조사” 응답을 분석한 결과, 인도네시아인들은 한국인들에 비해 게으르고(90.9%), 청결하지 못하고(95.6%), 정직하지 못하다(70.6%)는 응답이 압도적이었다. 또한 인도네시아인들을 낮은 문화수준(80.9%)과 낮은 질서의식(82.1%)을 가진 것으로 평가하는 한국인들이 매우 많은 측면에서도 인도네시아를 깔보는 태도가 확연히 드러난다. 28

인도네시아인들에 대한 인종주의적 의식은 가끔씩 병적인 태도로 나타나기도 한다. 수라바야에 소재한 한 봉제업체의 한국인 관리자는 일이 끝나는 오후 4시 15분전에 “하루도 빼 놓지 않고” 200명의 출근부를 작업장 바닥에 내 던지고, 자기 것을 찾아 아우성치는 노동자들을 보면서 즐긴다고 한다. 29 또 같은 공장의 다른 관리자 한 사람은 한 노동자가 발을 다쳐 붕대를 감고 새 슬리퍼를 신고 나타나자, 건방지게 새 슬리퍼를 신었다고 가위로 싹둑 잘라 버리고는 돈을 던져 주었다는 것이다. “돈이면 다 된다”는 한국인들의 졸부 근성은 못사는 나라에서 더욱 활개를 치고 있었다.

한국인 남성 관리자들의 성희롱이나 성폭력도 꽤나 흔한 것 같다. 본 조사가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못했지만, 필자가 만났던 많은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근무하고 있는 회사에서 한국인 관리자와 인도네시아인 여공이 동거 또는 “결혼”한 사례를 최소한 한 건씩은 알고 있다고 했다. 이 중 상당수 한국인 관리자들은 이미 기혼자로 알려져 있었다. 땅그랑과 보고르 지역에 소재한 외국인(주로 한국인) 신발업체 취업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 조사에 의하면, 한국인 관리자들의 성희롱에 대한 보복으로 인도네시아 남성 노동자들이 한국인 여성 관리자들을 덮쳐 강제로 입맞춤을 했다. 30 인도네시아뿐만 아니라 동남아 국가들에서 한국인들이 이미지가 악화된 것은 한국 남성들의 왜곡된 성인식과 퇴폐적인 성적 행태에 상당히 기인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31

4. “중간착취자”로서 한국인 이미지: 정치경제사적 의미

해외진출 기업 문제는 그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인들이 이 문제에 대해 알고 있는 바는 과장 또는 축소된 사실들이고 이에 대한 비판도 지극히 원칙적이거나 윤리적인 수준에서 제기되고 있을 뿐이다. 이번 현지조사를 통하여 필자가 갖게 된 새로운 생각은 해외진출 기업과 관련된 문제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르고 복잡하며, 이로 인해 야기될 수 문제도 훨씬 심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선 해외진출 기업 또는 한국인 투자 기업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지금까지 해외진출 기업을 말할 때 그것은 한국자본이 단독 또는 합작으로 현지에 투자되어 설립된 기업을 의미했다. 즉 해외진출 기업은 한국인 ‘투자’ 기업과 동일시되어 왔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인들이 인식하고 비난하는 한국적 경영방식은 비단 한국인 투자 기업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많은 다른 국적의 기업, 특히 현지 화인 기업이나 대만이나 홍콩의 중국인이 투자한 기업에서도 한국인들은 생산과 노동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결국, 해외진출 한국기업을 한국인 투자 기업뿐만 아니라 이러한 한국인 ‘경영’ 또는 ‘관리’기업으로 확대하여 생각할 때, 그 문제 해결의 열쇠를 찾을 수 있다.

노동집약적 업종에서 한국인들은 공장장, 생산관리자, 노무관리자, 중간관리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재인니(印尼)한국봉제협의회(Korea Industrial Garments Association in Indonesia) 초대 회장이었던 정동진 사장은 이미 파악된 40개를 넘는 비한국인 투자 봉제공장에서 한국인이 공장장을 맡고 있다고 했다. 인도네시아 소재 모든 봉제공장(한국인 공장 500여명 정도 포함)에서 관리자나 근로자로 일하고 있는 한국인 수는 1,500명에 이른다고 한다. 인력부 통계에 의하면 1995년 7월 현재 인도네시아에서 취업하고 있는 한국인 “근로자” 수는 8,008명으로 단연 우위를 차지하고, 한국 외무부 자료에 의하면 인도네시아 거주 한인 10,000명 중 “노동자” 수는 6,000명에 이른다. 32 또한 거의 모든 신발제조업체는 한국인 공장장, 관리자, 생산기술 지도자를 고용하고 있다. 현지 노동자들에 의해 “한국회사”(perusahaan Korea)라고 이야기되는 회사 중 상당수가 이런 회사였고,심지어는 한국인이 아닌 화인이 공장장이나 관리자로 있는 회사가 한국인 회사로 잘못 알려진 경우도 있었다.

왜 이런 현상이 빚어 지고 있는가? 이러한 한국인들을 한국으로부터 “밀어낸”(push) 요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한국에서 노동집약적 업종들이 임금상승으로 비교우위, 즉 국제경쟁력을 상실했다는 사실이다. 경영자나 일반관리자들은 다른 직종으로 전환할 수 있었지만, 생산직 관리자, 기술자, 노동자들은 그들의 전문성이나 경험 때문에 다른 직종으로의 전환이 쉽지 않았다. 해외로 이전하는 기업은 이들을 새로운 해외 공장에 배치했지만, 다른 업종으로 전환하거나 파산한 기업에 취업하고 있던 생산직 관리자와 기술자들은 스스로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이런 사람들 중 상당수가 인도네시아로 왔던 것이다. 정동진사장은 이런 사람들이 “제 발로” 현지 회사를 찾아가 자기를 “판다”고 하였다.

이들을 “끌어당기는”(pull) 요인도 만만치 않다. 노동집약적 분야는 신발제조업과 같이 인도네시아 투자가들에게는 새로운 업종이 많다. 따라서 이런 업종에서 축적된 경영, 생산, 관리 기술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신발산업과 같이 한때 세계 최고의 기술과 생산량을 자랑하던 한국이 양산한 생산직 관리자와 기술자를 인도네시아 기업들이 적시에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더 높은 월급과 직위를 미끼로 한국인 기업에서 이들을 빼 내어 가는 비한국인 기업도 있다고 한다.

또 다른 요인은 물론 “한국적 경영방식”이다. 같은 임금으로 강도 높은 노동을 강제하고 높은 생산성을 빠른 시간 안에 보장해 주는 한국적 경영방식은 노동집약적 중소업체에게는 대단한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주로 이들 기업은 주문자상표부착(OEM: original equipment manufacturers)방식에 의한 생산에 의존하고 있는 데, 주문을 하는 구미의 다국적 기업이나 수입업체들이 한국인을 공장장이나 관리자로 고용할 것을 하청업체에게 요구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이들 주문자나 구매자의 입장에서 볼 때, 짧은 기간 안에 생산성을 높여 낮은 가격으로 적시에 물량을 공급받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경영방식으로 인해 노사분규나 기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여 해결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면, 하청업체를 바꿔 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인들에 의해, 부산, 대구, 마산 지역의 생산직 관리자, 기술자, 노동자들은 인도네시아 소재 외국인 투자업체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들은 공장장, 생산관리자, 기술지도원으로서 한국에서보다 더 높은 직위와 나은 대우를 누리고 있다. 이들에게 맡겨지는 업무는, 앞서 논의하였듯이, 노동강도를 높이고 노동시간을 늘여 생산성을 높이고 납품 기한을 맞추는 것, 즉 생산관리와 노무관리이다. 따라서 이들은 노동자들을 일상적으로 그리고 현장에서 직접 대면하고 접촉하여야 한다. 또한 이들은 노동자들이 인간의 육체적 한계를 넘지 않는 최대한의 범위에서 작업을 하도록 유도, 독려, 강요해야 한다. 외국인 자본가는 노동자들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한국인 관리자들은 전선에서 이들을 감독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인 생산직 관리자와 기술자들의 해외 취업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이득은 무엇인가? 물론 고용효과와 무역외 수지 개선에 어느 정도 기여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수천 명에 지나지 않은 이들이 벌어들이는 돈이라는 게 한국인 이미지라는 국가적 “공공재”를 능가할 수는 없다. 해외의존도가 지극히 높은 한국경제에게 국제사회는 단순한 직장 이상의 엄청난 의미를 갖고 있다. 국제사회는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우리의 상품시장, 수입선, 투자대상 지역, 노동력제공자, 관광대상지이다. 이런 점에서 국제사회에서 형성해 가는 한국인의 이미지는 몇 천명의 취업과 몇 푼의 달러보다 훨씬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회사의 고용인일 뿐이다. 이들 관리자들은 정책결정, 자금관리, 금융 등 중요한 경영에는 참여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회사 소유자나 최고 경영자는 언제든지 관리책임을 물어 이들을 쫓아 낼 수도 있다. 이들은 하수인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이들 한국인들이 담당하고 있는 역할이 단순한 중간관리자를 넘어서는 특별한 의미를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심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인도네시아 정치경제사 속에서 “중간인”(middleman)의 역할을 중국인(화인)들이 담당해 왔다는 역사적 사실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화인들은 인도네시아 오랜 역사 속에서 중간인의 위치에 있었고, 토착인들에게 그들의 이미지는 중간착취자의 이미지였다. 33 중간인로서 역할 일부와 또 하나의 중간착취자의 악역을 한국인들이 넘겨받거나 분담하게 될 위험에 처해 있다.

화인들의 중간자 역할은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네덜란드 식민주의자들은 화인들에게 제국주의 및 식민주의와 토착인 사회를 잇는 중간 매개인 내지 착취자의 임무를 부여하였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와 네덜란드령 동인도(Netherlands East Indies) 정부는 화인들을 “외국동양인”(Foreign Orientals)으로 분류하여 유럽인들과 토착인들 중간의 법적 지위를 부여하였고, 이들에게 네덜란드 정부 및 무역회사를 일방으로 하고 생산자와 소비자로서 토착인 농민을 다른 일방으로 하여 쌍방을 연계시키는 직종에 종사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화인들은 유럽인들의 상품을 토착인들에게 팔고, 토착농민들의 생산물, 즉 환금작물을 집산하여 식민주의자에게 넘겨주는 중간상인으로서 종사하였던 것이다. 토착인들에게 비싸게 팔고 싸게 사들일수록 화인들의 이윤은 증대되었다. 또한 식민주의자들은 중국인들로 하여금 반도덕적이거나 착취적인 직종에 종사하게 함으로써 화인들의 이미지를 더욱 악화시켰다. 조세업무를 화인에게 위임하거나, 아편 제조 및 판매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중국인들에게 부여하였으며, 고리대금업이나 전당포 등을 화인들이 경영하도록 허용해 주었다. 토착인에게 비친 화인들의 모습은 식민주의자들의 앞잡이이자 토착인들에 대한 착취자와 다름없는 것이었다.

인도네시아가 독립하여 식민주의자들이 물러 감에 따라, 화인들의 경제적 지위는 향상되었지만 정치적 보호자는 사라졌다. 독립 이래 화인들의 새로운 후견인으로 등장한 것이 군부이다. 특히 1965년 통치권력을 손아귀에 넣은 수하르또와 군부세력은 화인들을 적절히 이용하였다. 수하르또 정권은 화인들에게 정치적 보호와 경제적 특혜를 제공하는 대신, 이들에게 인도네시아 경제를 부흥시키고 정치자금을 마련하는 임무를 부과하였다. 동시에 중국인들은 정치권력층 “측근”(client or crony) 기업인들과 합작을 통하여 이들의 부를 증진시켜 주는 데도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이러한 화인들을 “쭈꽁”(cukong)이라 부르는 데, 이 용어는 정치적 연줄을 이용하여 재벌이 된 화인들을 지칭하는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인도네시아의 화인들은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토착인들과 쉽게 융화될 수 없는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세속적 성격이 강한 중국인들의 종교관, 배금사상과 물질주의, 돼지고기와 술을 즐기는음식습관, 도박 선호 등은 이슬람교의 교리와 정면으로 부딪히는 요소들이다. 이러한 요소들로 인하여 이웃 태국이나 필리핀의 화인들과 달리 인도네시아 화인들은 토착문화에 동화되어 가는 속도가 무척 느리다.

최근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한국인들의 모습이나 역할도 화인들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다. 한국인 투자 기업은 하나같이 정치권력에 접근하여 연줄만들기에 급급하여 인도네시아 지식인들의 빈축을 산다. 인도네시아에 투자한 한국의 재벌기업들 중 적지 않은 기업들이 대통령의 자식들이나 정치적 연줄이 강한 화인들과 합작을 하고 있다. 외국인 기업이나 화인 기업 등 현지 기업에 경영을 대신하는 한국인 경영자들은 자본가들의 앞잡이로 비칠 뿐이다. 34 이들 기업에 취업한 한국인 관리자들은 토착인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쥐어 짜는 중간착취자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다. 자카르타 시내에만 해도 8개나 되는 한국인 교회나 성당도 총인구의 90퍼센트가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인도네시아인들에게 곱게 보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십여 개에 달하는 한국인 전용 카라오케 술집과 한국인들의 음주문화도 추악한 한국인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35

“중간착취자”로서 한국인 이미지는 큰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과거 화인들이나 일본인들의 경험에 비춰 보면, 한국인들도 결코 수수방관하거나 안심할 수만은 없다. 화인들은 정례적이라고 할 정도로 자주 토착인들의 보복과 공격을 받아 왔다. 네덜란드 식민주의 확립 이후 인도네시아 땅에 정치적, 사회적 혼란이 올 때 마다, 화인들은 학살, 테러, 살인, 약탈, 방화의 대상이 되곤 했다. 지난 10여 년간 화인에 대한 차별이나 공격은 크게 줄어 들었지만, 그럴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또한 수하르또 정권이 화인들의 후견인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토착인들의 불만과 좌절을 일시적으로 해소시키는 방책으로 반중국인정서를 이용하여 화인들을 희생양으로 이용하는 측면도 엿보인다. 1974년 1월 일본인들의 정치권력 및 화인과의 유착에 불만을 품어 자카르타와 반둥에서 반일폭동이 수일간 계속되었던 적도 있다. 일본은 이 사건(일명 말라리Malari 사건)으로 큰 교훈을 얻었고 이후 이미지 개선을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하였다. 이러한 이야기가 한국인들에게 아주 무관한 것일 수만은 없다.

5. “약자들의 무기”: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의 담론 투쟁

“중간착취자”로서 한국인 이미지와 비인간적인 “한국적 경영방식”이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의 인식과 의식 속에 넓게 그리고 깊이 확산, 침투하고 있다는 사실은 자본주의 헤게모니에 성공적으로 대항하는 피지배계급의 담론 형성 과정을 보여준다. 사실상 “한국적 경영방식”은 한국인 기업에만 배타적으로 적용되는 것도 아니고, 초기에 볼 수 있었던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노동통제도 크게 이완되고 있다. 적지 않은 대규모 한국인 기업은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이 선망하는 직장이 되고 있으며, 중소 규모의 한국자본 투자도 최근 2,3년간 급격히 감소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 관리자들의 “중간인”으로서 역할은 신발, 봉제, 완구 등 일부 노동집약적 산업에 제한된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기업은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이 혐오하는 가장 착취적이고 비인간적인 작업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는 “약자들의 무기”(weapons of the weak)로서 노동자 담론(discourse)의 승리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말꾸미기, 말퍼뜨리기, 험담, 과장, 거짓말 등 “말들의 전쟁”(war of words)을 통한 노동자들의 저항인 것이다. 36

필자가 만났던 대부분의 한국인들, 특히 회사와 공장을 직접 경영하고 관리하는 한국인 사장, 공장장, 부장, 과장, 기술자들은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근거가 없거나 과장된 거짓말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했다. 공보관, 노무관, 상무관 등 한국대사관에서 한국인 투자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는 외교관들도 역시 한국기업에 대한 나쁜 인식과 언론보도에 분개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을 직접 만나 사실을 캐면서 수없이 맞닥뜨린 어려움도 이들의 입을 통해 거침없이 전달되는 과장과 헛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 정부는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각종 유인을 확대해 왔으며, 지난 10여년간 꾸준히 외자정책을 자유화해 왔다. 그 결과 매해 기록적인 외국자본이 도입되는 놀라운 성과를 보이고 있다. 필자가 면접했던 투자조정청(BKPM: Badan Kordinasi Penanaman Modal)의 관료들도 한국기업의 노사관계가 우려할 바 아니라고 애기했다. 과거 외국자본의 종속적 폐해를 지적하고 자력갱생을 옹호하던 모슬렘 지식인들이나 민족주의자들의 목소리도 거의 사라졌다. 즉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헤게모니, 개방의 담론이 인도네시아 사회를 지배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왜 한국기업의 경우에는 진실이 승리하지 못하고 자본주의 지배담론이 통용되지 않는 것일까?

이는 인도네시아의 한인들이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의 투쟁방식이 담론 투쟁임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담론 투쟁의 힘과 파괴력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은 억압적 국가와 거대한 자본 앞에 명백히 보잘것없는 약자일 뿐이다. 인도네시아 국가는 노동 부문을 잠재적 공산주의자로 보는 매카시즘(McCarthyism)적 시각을 견지하며, 노동운동을 적대시하고 있다. 따라서 국가의 노동정책이 정치적 수준에서는 억압적일 수 밖에 없다. 최근 10여 년간 추진된 각종 개혁정책들은 자본의 활성화, 노동의 약화를 꾀하는 신자유주의의 범세계적 물결을 타고 있다. 이미 취약한 인도네시아 노동은 급속한 노동집약적 산업화에도 불구하고 보수주의적 국가와 사회 분위기에 눌려 저항을 조직화하지 못하고 있다. 조직적 노동의 약화와 실패는 인도네시아 노동시장에 의해 더욱 강화되고 있다. 노동인구와 실업 및 잠재적 실업의 증가는 노동시장을 “구매자의 시장”(buyer’s market)으로 형성해 놓고 있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은 무기력한 약자로서 조직적이고 공개적인 저항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

그렇다면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은 어떤 형태의 저항도 포기해 버렸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억압적 국가, 패권적 자본, 약화된 노동의 삼중적 곤경 속에서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무기”를 들고 ‘효과적으로’ 대항하고 있다. 그 무기는 “말”이며, 말의 전쟁은 공개적 조직적 저항이 감수해야 할 희생을 낳지 않고 적을 파괴하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한국적 경영방식의 기원과 실체가 무엇이든, 모든 비인간적 생산관리와 노동통제를 한국적인 것으로 낙인 찍어 버린 이 조용한 전쟁의 효과를 어떻게 무시할 수 있겠는가? 350여 개 한국인 회사에서 일하는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은 최소한 10만에 이른다. 37한국인 회사와 공장에서 이들이 겪은 경험과 받은 인상은 가족, 친구, 친족의 체계와 연계망을 타고 인도네시아 사회로 넓게 확산되고 있을 것이다. 그 확산과정에서 인도네시아인들이 공유하는 인종적, 민족적 정서가 열효율 높은 연료가 됨은 물론이다. 그 연계망의 언저리에서 반한국인 담론은 굳건히 형성된다.

필자는 이번 조사를 통하여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의 한국인 사용자들에 대한 저항방식이 담론 투쟁이며 그것이 상당히 효과적인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가 직접 만났던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저임금, 폭력, 강제잔업 등 저급한 형태의 노동통제를 확인해 주지 못했다. 심지어 이들로부터 고정사항을 일차적으로 전해들은 노동운동가들의 이야기조차 과장된 것이거나 거짓말임이 밝혀 진 경우도 있었다. 몇 단계를 건너며 과장은 커지고 거짓말은 살이 붓는다.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실제적으로 경험한 사실과 공장 멀리서 비노동자들이 나누는 담소들간에는 큰 간극이 항상 존재했고, 이 간극의 존재는 노동자들의 저항양식이 한국인 사용자의 정면을 향한 직접적, 공개적 공격이 아니라 한국인 사용자의 뒤통수와 익명의 한국인들을 향한 간접적, 비조직적 저항임을 이야기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저항이 효과적인 것이었음은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이 가장 취업하고 싶지 않은 기업이 한국기업이라고 모두 이야기한다는 점, 노동자가 아닌 일반인들이 한국 기업을 가장 착취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 한국회사의 노사분규에 관한 언론보도가 허위나 과장이 많다는 점, 한국인 이미지에 대한 인도네시아인들의 인식이 과도하게 나쁘다는 점 등을 통해 분명히 확인된다. 38

1993년 하반기를 시점으로 한국의 중소자본은 인도네시아로부터 등을 돌렸다. 적지 않은 한국인 기업이 문을 닫거나 생산라인을 줄였고, 중소규모의 신규투자는 거의 중단되었다. 반면, 살아남은 회사들은 임금체계의 변화, 임금인상, 기타 근로조건 개선, 노무관리의 현지화, 자동화 등 경영방식의세련화를 통해 생산성 향상을 꾀하고 있다. 한국인 회사에서 발생하는 파업이나 태업의 수는 1994년 하반기부터 급격히 줄었다. 이 결과를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이 벌여 온 담론 투쟁의 승리로 읽을 수는 없는가? 설사 이 승리가 자본주의의 지배적 헤게모니 하에서 얻어 낸 부분적이고 보잘것없는 승리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인도네시아의 한국인 자본가, 경영인, 관리자, 나아가 한국 국민 일반에게는 커다란 상처를 입혔다는 점은 명백하다. 일본인들이 “경제적 동물”(economic animal)의 누명을 벗는 데 수십 년이 걸린 것처럼, 한국인들이 “추한 한국인”(ugly Korean)이라는 이 상처를 치유하는 데 못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신윤환
서강대학교

이 연구는 교육부가 지원한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공동연구의 일환으로 실시되었으며, 『사회과학연구』, 제4집 (1995, 12월), pp. 293-335에 실린 바 있다. 이 논문에서 쓴 현재형 시제는 현지조사와 분석이 행해진 1995년 중반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 15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 맞춰 변형하지는 않았음을 밝혀둔다. 이 논문을 정확하고 아름다운 인도네시아어로 번역해 준 문화인류학자 조윤미박사께 감사 드린다.

Notes:

  1. 당시 인도네시아 인력부(Departemen Tenaga Kerja)의 인도네시아 전국 노사분규 통계와 인도네시아 주재 한국대사관의 한국인 투자기업 노사분규 통계 모두 분규사례를 크게 축소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인력부 통계로는 <표 4>를 보라.
  2. 조사원들의 현지조사기간은 필자가 1995년 7월 9일 – 26일, 김은영이 7월 9일 – 30일, 차미경이 7월 8일 – 30일, 전제성이 7월 9일 – 14일이었으며, 필자는 같은 기간 동안 자카르타 한인사회에 관한 연구도 아울러 수행했기 때문에 본 조사에 전념하지는 못했다. 인도네시아어 통역은 필자와 한국외국어대학교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에 재학중인(당시) 김성현군이 부분적으로 담당하였다. 김은영과 차미경의 면접기록을 많이 참고하였지만, 이 글의 주요 논지와 분석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필자에게 있음을 밝혀 둔다.
  3. 제조업 분야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의 평균임금은 1991년과 1993년 사이 2년간 달러가격으로 54%라는 큰 폭의 상승을 보였다. 1993년 당시 시간당 평균임금은 미화 43센트로 스리랑카 동종 노동자들의 39센트, 베트남의 37센트, 중국의 36센트, 그리고 방글라데시의 23센트를 앞섰다. 베트남을 제외하고는 모두 인도네시아보다 임금이 높았던 나라들이다. 모건 스탠리 리서치의 조사결과를 보도한 Kompas, 1994년 6월 25일자 참조. 인도네시아 정부는 1994년, 1995년 두 차례에 걸쳐 각각 20-40%씩 지역별 최저임금을 인상하였다.
  4.  메단사태라고 불린 노동자들의 파업과 시위는 북수마트라 주도인 메단시의 주변 공단지역에서 1994년 4월 14일에 시작되어 일주일 이상 지속되었다. 이 사태로 중국계 기업인 한 명이 타살되었고, 30여 동의 건물과 공장, 40여대의 자동차, 150여 개의 중국인 가게가 파괴되거나 피해를 입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비합법 자유노조인 인도네시아노동자복지연합(SBSI: Serikat Buruh Sejahtera Indonesia)을 배후 조종 단체로 지목하고 의장을 비롯한 간부들을 구속, 기소하였다. 이후 SBSI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5.  한때 대규모 노사분규에 휘말렸던 (주)태화(PT. Taehwa)의 경우, 최저임금이 큰 폭으로 인상됨에 따라 임금도 따라 올랐고, 최근 몇 년간 파업도 단 한 건조차 없었다고 한다 (김은영.차미경이 태화 여성노동자와 행한 면접, 1995년 7월 14일). 한때 노동운동단체에서 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는 한 여성노동자는 나이키 운동화를 주문생산하는 (주)하시(PT. Hasi)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최근 파업이 없었으며 월급도 345,000루삐아로 만족스러운 수준이라고 말했다 (7월 15일 면접). 그러나 두 공장 모두에서 소리를 지르고 욕설을 퍼붓는 행위나 가벼운 폭력은 여전하고, 그럴 경우 대개 참거나 그냥 웃어넘긴다고 하였다.
  6.  실제로 동부자바의 말랑(Malang)에 소재한 가죽자켓봉제업체 (주)조은인도네시아(JEI: PT Jo Eun Indonesia)의 한 관리자는 여성 노동자를 때려 실신시켰는 데, 이 사건은 신문에 크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보도되었고 분규도 장기화되었다. Surya, 1994년 1월 22일.; Surabaya Post, 1994년 1월 22일.; Surya, 1995년 2월 21일.; Jawa Pos, 1995년 3월 25일.
  7. 차미경과 김은영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수라바야 지역에는 아직도 이러한 노골적이고 폭력적인 노무관리를 하고 있는 한국인 업체들이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현격한 도농격차나 자바인들의 유순성을 감안하면, 자카르타 주변지역의 덜 폭력적인 노사관계가 아직 지방으로까지는 확산되지 못한 까닭일 수도 있다. 이는 수라바야의 장갑봉제업체 KSI의 노동자를 상대한 차미경.김은영의 면접(1995년 7월 28일)과 말랑의 가죽자켓봉제업체 JEI에 대한 언론보도에서도 확인되는 사실이지만, 후자(JEI)의 경우에서 보이듯이 한국인 폭력에 대한 이 지역 노동자들의 반발이나 보복 또한 갈수록 커지고 있다. 올 봄에는 말랑의 한 한국인 사장이 강도살인을 당한 적도 있었다.
  8.  이에 대해 아래 기사들을 참조하라. 최저임금제를 준수하지 않은 30개 기업을 경찰에 고발조치하고 재판에 회부케 하겠다는 노동부의 방침(Kompas, 1994년 3월 26일).; 서마랑 시장이 팀을 구성하여 회사들의 최저임금제 준수를 감시하겠다는 조치(Suara Merdeka, 1994년 6월 1일).; 노동법규 특히 최저임금제를 지키지 않는 기업의 블랙리스트를 작성하여 감시하겠다는 인력부 장관의 방침에 대하여 수하르또 대통령이 행한 지지 발언(Pikiran Rakyat, 1995년 3월 1일).; 최저임금제를 포함한 노동법규를 위반한 202개 업체에 대한 인력부 조사 사실(Kompas, 1995년 5월 27일)과 48개 기업에 대한 처벌 사실(Harian Terbit, 1995년 5월 27일). 그러나 위반에 대한 벌칙은 최고 15 개월 형과 벌금 5만루삐아 이상 5백만 루삐아 미만(1만5천-백5십만원 정도)으로 지나치게 가볍다는 비판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최저임금제 위반에 대해 벌칙을 더 강화해야 한다는 학계의 주장(Suara Merdeka, 1994년 6월 3일), 재판부의 견해(Jaya Karya, 1994년 7월 2일)와 정부가 최저임금제 위반 업체를 처벌하는 데 미온적이라는 시민단체의 비판(Kompas, 1995년 4월 21일) 등이 있기는 하지만, 최저임금제도의 규범적 효과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9. 수하르또 집권기의 인도네시아 노동운동과 노동정책의 변화에 대해서는 신윤환, “노동의 취약성과 국가의 억압적 통제: 수하르또 체제하의 인도네시아 사례 연구,” 『아시아문화』, 제6호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90), pp. 93-125.; Manning, Chris. “Structural Change and Industrial Relations during the Soeharto Period: An Approaching Crisis?,” Bulletin of Indonesian Economic Studies. vol. 29, no. 2, (August 1993), pp. 59-95를 참조할 것.
  10. 인도네시아 전문가들이나 학자들은 흔히 수출주도, 수입대체, 고도기술축적 등 이질적이고 상호 모순된 산업화 전략을 동시에 추구하는 수하르또 정부를 “비합리적인” 정책결정자로 비판하지만, 수하르또를 정점으로 한 권력핵심세력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경제발전략이야말로 다양한 정치엘리트들의 이해관계를 만족시키는, ‘정치적으로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Yoon Hwan Shin, “Demystifying the Capitalist State: Political Patronage, Bureaucratic Interests, and Capitalists-in-Formation in Soeharto’s Indonesia,” (Unpublished Ph.D. dissertation, Yale University, 1989), chaps. 4-5.
  11.  수라바야 소재 수출용 식기제조업체인 (주)경동인도네시아(KDI: PT Kyong Dong Indonesia)에서의 노사분규가 그 예이다. Karya Darma, 1994년 4월 22일.; Surabaya Post, 1994년 4월 22일. 그리고 땅그랑 공단에 있는 신발업체인 (주)동주(DJ: PT Dong Joe)의 노동자들이 1993년 9월 27일 파업을 벌이면서 요구한 사항도 장기근속자를 더 많은 임금으로 대우해 줄 것을 포함하고 있다. Pelita, 1993년 9월 29일.
  12. 전제성이 스웨타공장 CJ기업의 한국인 공장장과 실시한 면접, 1995년 7월 13일. 이 기업에서는 최저임금에 식대를 포함시켜 지불해도 무방하다는 사실을 뒤에 알고 바꾸려 했다가 분규를 겪었다고 한다
  13. 자켓을 만드는 SA라는 회사는 파업 주동자로 파악된 13명의 노동자들에게 도급제 노동을 중단시키고 7시간 기본시간 근무를 명하였다고 한다 (남성노동자와 면접, 1995년 7월 15일).
  14. 수라바야 소재 장갑제조업체 (주)꼬메가스포트인도네시아(KSI: PT Komega Sport Indonesia)회사 여공을 상대로 한 김은영.차미경의 면접 (1995년 1995년 7월 28일). 이 회사의 과거 노사분규 사태에 대한 언론 보도로는 Surabaya Post, 1992년 2월 29일, 1993년 3월 17일을 보라.
  15. 화장실 통제 문제가 노사분규의 한 요인이 된 사례에 대한 보도로는 Suara Karya, 1993년 5월 18일을 보라. K1기업 여성 노동자 3명과의 필자 면접 (1995년 7월 16일).
  16. Business Indonesia, 1993년 9월 29일.
  17. 익명을 요구하는 한 한국인 신발업체의 노무관리 담당자는 1990년을 전후한 진출 초창기와는 달리 당시 한국기업들은 노동법규를 잘 지키는 편이라고 하면서, 앞으로는 향후 기계 도입과 자동화로 인한 대량 해고
  18. 익명을 요구하는 한 한국인 신발업체의 노무관리 담당자는 1990년을 전후한 진출 초창기와는 달리 당시 한국기업들은 노동법규를 잘 지키는 편이라고 하면서, 앞으로는 향후 기계 도입과 자동화로 인한 대량 해고 문제와 각종 직업병과 작업환경이 주요 파업요인이 될 것이라고 내다 보았다. 김은영의 면접, 1995년 7월 20일.
  19. Kompas, 1992년 5월 19일.; Merdeka, 1993년 9월 22일. 3대 한국계 재벌그룹인 꼬데꼬(Kodeco) 계열의 PT. Kodeco Electronik Indonesia에서는 상한 음식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150명이 식중독에 걸려 인도네시아 신문들이 대서 특필한 적이 있다. Kompas, 1993년 12월 9일.
  20. 이 공장은 나중에 화인(중국인) 소유 기업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공장장은 한국인이었고, 공동 목욕을 시키는 사실은 공장장도 확인하였다. 필자의 SA 남성 노동자들과 면접, 1995년 7월 15일; 김은영.차미경의 동 노동자들과 확인 면접, 7월 19일; 김은영과 차미경의 SA 한국인 공장장과 재확인 면접, 7월 19일. 이 사례는 필자가 이 글을 쓰는 데 많은 생각거리들을 제공하였다.
  21. Astek(Asuransi Sosial Tenaga Kerja, 인력사회보험)은 민영회사가 PT. Astek에 가입하게 되면 그 종업원이 상해, 사망, 퇴직시 보험금을 받게 되는 보험제도를 일컫는 데, 정부는 모든 회사가 이에 가입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22. 이러한 노동조합으로 1990년에 결성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자유노동자연합(SBM: Serikat Buruh Merdeka)과 1994년 지역에 기반을 두고 창설되었던 보고르 참 노동조합(SB: Sejati Bogor) 및 땅그랑노동자연합(Serikat Buruh Tanggerang) 등이 있으나, 주목 받을 만한 자유노조는 1992년 결성된 인도네시아노동자복지연합(SBSI: Serikat Buruh Sejahtera Indonesia)뿐이다. 그러나 SBSI조차도 정치적인 성향이 강하고 현장 기반이 강하지 못했으며, 메단사태 수습과정에서 정부의 탄압에 밀려 그나마 힘이 크게 약화되었다. Human Rights Watch/Asia, The Limits of Openness: Human Rights in Indonesia and East Timor. (New York et al: Human Rights Watch, September 1994), pp.40-87, 특히 pp. 46-8을 참조.
  23. 앞서 얘기했듯이 <표 4>는 정부의 공식통계로 노사분규의 수를 줄이고 있다. 한 노동운동 단체가 신문보도를 통해 취합한 결과를 보면, ‘자카르타 및 서부자바 지역만’에서도 1992년 206건, 1993년 229건, 1994년 315건, 1995년(1-8월) 190건의 파업이 발생하였다. 이는 첫째 정부의 전국 파업 수치를 훨씬 앞서며, 둘째 노사분규의 증가추세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1995년 10월 12일, Fauzi Abdullah 제공. 또한 인도네시아법률구조재단 수라바야 지부의 보고서는 1995년 1월부터 11월까지 동부자바 지역의 분규가 135건에 이른다고 밝히고, 이를 상세히 분석하고 있다. Lembaga Bantuan Hukum Surabaya, “Tinjauan Pelaksanaan Hak Asasi Manusia pada Perburuhan di Jawa Timur, Januari – November 1995,” (Typeset: u.d.), pp. 1-15.
  24.  1992년 9월 26일 신발제조업체 (주)성화(SHD: PT Sung Hwa Dunia) 노동자 6,500명은 최저임금 지급, 생리 및 출산 휴가 보장, 노조임원 개선, 통근버스 증설 등을 내세우고 파업을 벌였다. 이에 신고를 받은 경찰은 노동자 40명을 3명씩 소환하여 조사한 뒤 조서를 회사측에 통보하였다. SHD는 다음해 1월 5일과 11일 사이에 노동자 24명에게 대기근무와 공장출입금지를 차례로 명하였다가 결국 해고 통고를 하였다. 해고조치에 불복한 19명은 노사중재위원회(P4P)에 중재를 신청하여 승리를 이끌어 내었으나, 이번에는 회사측이 불복하여 인력부에 결정을 의뢰하였다. 인력부는 P4P의 중재결과를 뒤집어 버렸고, 이 사건은 현재 재판에 계류 중이다. 인도네시아법률구조재단(YLBHIJ) 자카르타 사무소가 제공한 “Resume Putusan, No. 113//G/ 1994/Peg/PTUN/Jkt)”; 1995년 6월 29일과 김은영의 해고노동자 3명과의 면접, 1995년 7월 14일. 면접에 응한 노동자들은 해고 노동자들 대부분이 주동도 아닐뿐더러 왜 해고되었는지 모른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25. 앞서 언급한 SA기업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노동자들의 이야기에 대해 공장장은 이 사실을 부인하였다. 면접 노동자들에 의하면, 파업이 일어나 경찰과 군인이 출동하자 회사측은 협상에 응해 노동자들의 요구에 합의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음날 회사 사장은 모든 노동자들을 집합시켜 놓고 협박성 훈시를 하였고, 2명의 쁘레만이 술을 먹고 들어와 노동자들 멱살을 잡고 “네가 주동자지?”하면서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했다는 것이다 (필자의 SA 노동자 3명과 면접, 1995년 7월 15일; 김은영.차미경의 확인 면접, 7월 19일). 그러나 이 지역 노동자들이 너무 거칠어 과격하게 다룰 수 밖에 없다고 말한 한국인 공장장은 쁘레만 동원 이야기는 유언비어일 뿐,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김은영.차미경의 SA 한국인 공장장과 면접, 1995년 7월 19일).
  26. Berita Buana, 1995년 3월 2일. 같은 날자의 Kompas와 Republika도 상세한 기사를 싣고 있다. 그 이후 전개에 관해서는 Kompas, 1995년 3월 6일과 Media Indonesia, 1995년 3월 7일을 보라.
  27. 한국인 관리자들의 거칠고 난폭한 언행은 이들의 지역적 배경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음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초기에 진출한 신발, 섬유, 봉제 업체는 경상도, 특히 부산지역으로부터 이전, 투자한 기업이 다수를 이룬다. 이들 업종의 인도네시아 진출 과정에는 자본이나 기계뿐만 아니라, 관리자와 생산직 근로자들도 동반하였다. 이번 조사 과정에서 만났던 한국인 남성, 여성 관리자들은 경상도 지역 공장 출신 노동자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또한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이 익혀 흉내 내는 욕설도 경상도 말과 발음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추한 한국인 이미지를 지역성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타당하지도 정당하지도 않다. 한국인의 인상은 동남아나 중남미 같은 직접투자 대상
  28. 이 조사는 훗날 이갑윤과 함께 분석한 “동아시아 경제위기의 원인과 결과: 인도네시아인과 태국인들의 인식 비교”, 『동아연구』, 이상우.이태욱 교수 퇴임 기념 특별호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2004년 9월), pp. 41-87으로 출판되었다.
  29. 김은영과 차미경이 KSI 여공 2명과 한 면접, 1995년 7월 28일. 면접자들은 도저히 이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아 재차 질문하였더니, 이 여공들은 4시 15분이 되면 같이 보러 가자고 했다고 한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 작태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된 뒤 회사측은 이 이야기가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라며 필자에게 강력히 항의한 바 있다. 『NEWS+』, 1996년 1월 18일, p. 38. 물론 이 글의 주장과 관련시켜 볼 때, 이 이야기가 만약 노동자들이 꾸며 낸 허구이거나 과장이라면 이러한 행동은 명백히 노동자들의 ‘담론투쟁’에 해당한다.
  30. Ari Saptari, Indrasari Tjandraningsih, and Juni Thamrin, Tenaga Kerja Pedesaan pada Industri Besar Sepatu Olahraga untuk Expor: Studi Kasus Tangerang dan Bogor, Project Working Paper Series, No. B-20 (Bandung: Institute of Sosial Studies, Bandung Research Project Office, July 1991), p. 55.
  31. 1995년 5월 19일자 신문들은 38세의 한국인이 18세난 가정부를 모델로 포르노를 찍은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결혼까지 약속하고 고향집을 방문하기까지 했으나, 결국 도망을 쳐 버려 경찰이 출국금지를 요청했다고 한다. Pelita, 1995년 5월 19일.
  32. Aris Ananta and Avanti Fontana, “Labor Policy in Indonesia in Relations to Foreign Firms and Labor Relations in Korean Firms in Indonesia,” Paper presented to the Second Korea-ASEAN Conference on Trends in Economic and Labour Relations between ASEAN and Korea, The Swiss Grand Hotel, Seoul, Korea, October 19-20, 1995, p. 18에서 재인용. 외무부 한인통계는 의도적으로 한인 수를 축소 발표하고 있다.
  33. Audrey R Kahin, “Brokers and Middlemen in Indonesian History: A Review,” Indonesia. no. 36 (October, 1983), pp. 135-42.
  34. 땅그랑의 한 신발업체(H)에서 생산부장으로 일하고 있는 L씨는 이러한 한국인들을 “용병”으로 표현하고 이들은 화인들(회사 소유자)과 토착인들(노동자)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담당한다고 말했다. 김은영.차미경의 관리자 L씨와의 면접, 1995년 7월 18일.
  35. 한국인들의 행태에 분노한 가명의 한 한국인은 1991년 9월, 10면에 달하는 유인물을 작성하여 한국인들이 자주 이용하는 수퍼마켓에 뿌렸다. 그 유인물에는 “잘난 한국놈”, “사모님, 사모님, 우리 사모님”, “정력제를 찾아라”, “화교들하고 친해야 한다”, “맛사지”, “한국인은 본업소의 출입을 금함”이란 소제목하에 자카르타 한인들의 의식과 행태를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원색적으로 비난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에 오래 거주한 교민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 유인물에 적힌 내용과 비판에 동감을 표시하였다. 全韓國, “한국놈 개새끼” (자카르타: 유인물, 1991년 9월 10일), 참조.
  36. James C Scott. Weapons of the Weak: Everyday Forms of Peasant Resistance. (New Haven and London: Yale Universrsity Press, 1985), 특히 chap. 6.
  37. 이는 공식적인 ‘최소한의’ 수치에 불과하다. 국내기업(PMDN)으로 등록되어 있지만 사실상 한국인이 소유한 기업, 한국인이 경영만 하는 기업, 한국인이 공장장으로 있는 기업 등을 모두 합하면 최소한 500개의 기업이 “한국인 회사”로 인식되고 있을 것이다. 한국인들이 중간관리자나 기술지도원으로 있는 회사까지 합한다면, 한국인을 일상적으로 대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은 수십만에 이를 것이다.
  38. 인도네시아인 972명을 대상으로 한국일보와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이 공동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인들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는 인도네시아인들(26.4퍼센트)보다 나쁜 인상을 갖고 있다는 사람들(33.3퍼센트)이 7퍼센트나 많았다. 양국관계속에서 전쟁, 침략, 식민통치 등 직접적 피해도 입히지 않은 나라에서 이러한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실로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일보』, 1995년 5월 24일자 보도.